(2) '열 처녀 비유와 2023.12.10. 권면의 말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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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창순성도 작성일24-05-31 19:25 조회51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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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율법은 육체에 주신 행위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육체의 법을 주셔서 행하게 하시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이고 그러나 이제 신약은, 예수님이 십자가 구원을 이루신 때부터는
무슨 법일까요? 맞습니다! 신약은 믿음의 법으로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믿음의 법! 그러니까 구약의 육체의 법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으므로
이제 신약은 그 법 속에 있는 의미를 믿음의 법으로 받아 영적 삶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이라 말했어요. 영적인 것이라 한 것은 ‘하나님의
일은 영의 일이요 그 영의 일을 영이신 성영님으로 받아 알고 스스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은 순종이라 표현하고 신약은 믿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구약에도 믿음을 말하기도 했고 신약에도 순종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구나! 사람을 지으셨구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구나 하는 것을 믿는 ‘이것은 육체에 속한 믿음이야!’
그러나 ‘이제는 자기 속에서 성영님으로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과 구약의
기록된 말씀과 성전의 뜻을 연관하여 깨달아서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어 감으로
스스로 알고 행하는 것이 돼야 하는 믿음의 법으로 그것이 영적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성영님으로 행하는 영적인 법!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법을 행하는 영적 믿음, 속사람(성영님)의 믿음이란 말입니다’ 아멘!
그런데 예수님의교회 성도들 안에도 이 속사람의 믿음이 되어 있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산상의 말씀도 다 성전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구약에서 보이신 성전을 벗어나서는 예수님을 바로 알 수도 없고~
예수님과 한 몸의 연합을 절대로 이룰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절대로 바로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구약을 빼놓고 구원을 말할 수도 없고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친 하나님의 뜻이요, 말씀입니다. (아멘)
그런데 오늘날 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것을 우리가 행해야 되냐?
반문하고 대적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어! 아니, 언제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것 행하라고 했습니까? 가서 짐승 잡아다가 성전 제사를 하라고
했습니까? 절기들 지키라고 했어요? 그런 미련한 소리로 반박하는 것~
성영님의 말씀, 영의 레마가 심어질 밭(마음)이 아니라 다른 밭이기 때문에
그같은 반응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알아듣는 것 같지만~ 뭔가 알아듣고 아는 것 같아!
그렇지만 영으로 듣는 것이 아니고 육의 귀로 듣는 것이기에 그 미련함이
드러난다는 것, 알아듣습니까?
영(레마)의 말씀을 영(성영님)으로 듣지 못하는 거예요.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본 속에 어떤 욕구들이 휘몰고 있기 때문에~ 영에게 주시는 말씀이
듣기가 안 되니 그 마음에 빛이 없으니 당연히 들리지 않고 자유가 없지요.
그러니까 여기 말씀은 내게 자유를 주는 말씀이 아니라고 말씀에 대하여
자기가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말씀을 훼방하는 죄로써 성영 훼방죄까지
속하게 되는 것이지요.(마12:31)
제가 이 말 함부로 쓰는 것 아니라는 것 하나님 앞에서 선포합니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그 죄에 걸려 버리는 거예요.
(마12:32) 그러니까 이 말씀은 너를 살리고 구약과 신약의 차이와 관계를
알고 제대로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성전된 믿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세상에 잘못 믿고 있는 교회나 또 말씀의 갈급함 때문에
영혼의 만족을 얻지 못해 고통하는 영혼들에게 생명 얻도록~ 믿음의
능력되도록~ 진리로 자유하라고~ (아멘!)
보내신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선포하였음에도 불고하고~
처음엔 와~ 이 말씀이 진짜구나! 어떻게 세상에는 없는 이런 말씀이
있나! 했다가 실제로는 자기중심, 자기 자아, 자기의 욕구!
이런 것들이 말씀보다 힘이 더 크니 말씀이 그 속에서 계속 죽는 겁니다.
그걸 절대로 내려놓지 않는 것이지요!
일생 그 마음이 그것에만 매여 있어서 자기에게 속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말씀이 그를 빗겨 가고~ 또는 받기는 하는데 그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 잠시 견디다 귀신에 뺏겨버리고,
쉽게 무너지는 모래 위의 세운 집이 돼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의 능력이 되지 않아! 성경은 구약의 솔로몬을 통해서
지혜의 말씀을 주셨어! 그 지혜의 말씀에서~
잠언 4장 23절에 뭐라 했습니까?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의 무엇을 지키라고 합니까?
생명의 근원의 것을 지켜야 하는 것을 말씀했지 않습니까?
이제 믿는 시간이 수십 년 세월들이 되었으니 지켜야 하는 것 설명하지
않아도 다 잘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무릇 지켜야 하는 생명의 근원의 것이 아니라
자기 육에서 나는 생각(자기는 그것이 믿음인 줄 아는 것)과
육체의 본능에서 나는 욕구들을 굳게 지키는 것이 돼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믿음의 길을 안내하는 역할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하는 반대의 길(마16:25)을 스스로 택하여 갑니다.
예배당 열심히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믿음에 대한 것이든~ 자기 삶의 것이든~ 자기 마음에 구상하여
자기 속에 갖고 있는 그것을 마음에 중독되듯 굳게 지키고 있는데~
그것들이 여기 말씀 앞에 오면 될 것으로 믿고 기대하여 와서
많은 세월 동안 있었는데 그것이 이뤄지지 않고~
또 자기 속의 거짓이 감춰지지 않고 드러난 것 같으니 말씀 앞에 있기가
매우 거북스러운 것입니다. 무엇인가 마음 귀퉁이에 표현할 수 없는 불안
같은 것, 무엇인가 표현할 수 없는 불만 같은 것이 도사려 있게 되니
그것이 무엇으로 나와? 나는 마음에 자유가 없다! 입니다.
자기 속이 어두우니 그 어둠이 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마음을 지키지 않으므로 자라온 그 어둠의 것을
자기가 스스로 알거나 깨닫지를 못하니 절대로 그 속에 자유가 없는 것
당연한 이치요, 진리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근원인 그 마음이 없는 육의 사람이라는 것이 사실은
또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육의 욕구들을 붙잡고 지키는 그것이
자기 믿음의 길이였던 것이지요. 믿음 생활이 열심인 것과 자기가 주체가 되어
말씀을 듣고 성경을 아는 것에 온전히 힘쓰니
결국은 바리새인이요 서기관인 그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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