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헵시바쁄라님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은혜로 작성일16-05-16 23:05 조회11,247회 댓글3건첨부파일
- 내가야곱은사랑하고에서는미워하였다.hwp (31.5K) 90회 다운로드 DATE : 2016-05-18 17:43:17
관련링크
본문
1.
헵시바쁄라님께.
여러 회원들께서 예정론에 대한 좋은 의견을 나누어 주셨고, 특히 진주문님께서 소위 말하는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오류와 폐해를 성경적 관점에서 지적해 주셨기에 많은 도움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다만, 헵시바쁄라님께서 에베소서와 로마서의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셨고, 특히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예로 들어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예정되었다.’는 잘못된 생각(예정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롬9:13의 말씀을 인용하셨기에, 늦었지만 이 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 늦게나마 추가적으로 글을 써서 올립니다.
(댓글로 올리려 했는데 생각보다 글이 길어져 답글로 올립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3)
롬9:13 말씀은 그 자체만을 따로 떼어 놓게 되면 해석하기가 굉장히 난해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할 수가 있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편애하실 수가 있지?’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이어 14절에서 “하나님은 왜 불의하십니까?” 하고 사람들의 항의가 있게 되는 것이고, 그에 대해 바울은 “그럴 수 없다.”라고 하나님 편에서 변론을 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제로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습니다.
위의 롬9:13 말씀은 말1:2-3을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사랑하시고 어떤 사람은 미워하시는지, 그것을 깨달아 봐야 하는 것이 ‘아버지께 듣고 배우는 자’의 당연한 의무가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어떤 자를 사랑하실까요?
다시 말해 하나님은 어떤 자를 사랑하여 기뻐하실까요?
이에 대해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5-6)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를 사랑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히브리서 말씀이 그것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야곱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야곱은 장자가 아닌 차자( 次子)입니다.
차자에게는 장자권에 대한 권리가 없습니다.
장자권은 먼저 태어난 장자에게 주어지는 권리이며, 특권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장자권을 바랐습니다.
장자권을 바랄 수 없는 차자였지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기에 그걸 얻고자 사모했고, 마침내 그걸 얻어 내고야 말았습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여기서 장자권에 대해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 장자권은 처음 출생한 아이가 갖는 특권과 책임을 말합니다.
특히 족장시대에는 이 장자권이 두 가지 측면의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장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 가정의 우두머리가 되어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가정을 통솔하는 통솔권을 가졌고, 아울러 다른 형제들보다 유산의 두 몫을 분배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신21:15-17).
아울러 부모와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책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장자는 가정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역할을 했고, 그와 동시에 언약적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한 가정(부족)의 우두머리로서 족장은 재산에 대한 상속권과 함께 제사장 역할을 감당했고, 영적 축복의 상속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자권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장자권에 대해서는 신성엽 목사님의 <신앙의 계보 통해 오신 예수님> 말씀을 들어보시면 더 많은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야곱의 믿음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그의 조부 아브라함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믿음으로 순종했고, 100세나 되어 죽은 자와 방불한 몸(나이 들어 단산한 사라와 함께)에서 믿음을 통해 약속의 씨를 받았고, ‘네 씨 곧 이삭을 통해 대적의 문을 얻고 천하 만민이 그 씨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믿음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었고, 믿었기에 순종했고, 마침내 믿음으로 약속하신 것을 얻었습니다.
야곱 또한 아브라함과 같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비록 차자였지만, 차자였기에 바랄 수 없었지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고자 사모했고, 침노하여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기뻐하셨고, 그의 하나님으로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11:16) 그와 그의 후손을 통하여 피 흘려 죽을 메시아를 보내시는 언약을 성취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셨습니다.
그는 불경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고, 그랬기에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창25:29-34)
그가 얼마나 불경건하고 불신앙의 사람이었는지, 또 다른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16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17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6-17)
그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자였고(빌3:19), 하나님의 언약과 영적 축복보다는 당장 자기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자기 앞에 진주가 있는데도 이를 알지 못한 채 발로 짓밟고 뭉개는 돼지와 같은 자였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7:6)
그는 장자권이 무엇인지, 그 안에 감추어 있는 영원한 언약과 영적인 축복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들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들사람이 된 이유가 ‘익숙한 사냥꾼’(창25:27)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익숙하다’는 히브리어로 ‘야다’인데 야다는 ‘알다’ ‘깨닫다’ ‘동침하다’ 등의 뜻으로,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을 말하며, 경험하여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에서는 자기의 경험과 지식과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이었고, 결국 들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장막에 거했습니다.
마치 가인이 농사하는 사람이 되고 아벨은 양 치는 자가 되었던 것처럼.
장막에 거했다는 것은 성경의 여러 말씀들을 살펴볼 때 제사, 곧 하나님을 부르는 것(예배)과 관련이 있고, 이는 또한 영적인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5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12:4-8)
1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2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3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중략…)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14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8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창13:1-18)
1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중략…) 9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18:1-10)
9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11:9-12)
에서는 자기의 경험과 지식과 능력을 쫓아 들사람이 되었지만, 야곱은 장막에 거하며 아버지 이삭과 그의 나이 15살까지 생존했던 조부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의 중요성을 깊이 묵상하여 깨달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얻고자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야곱 자신은 언약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장자가 아니었고, 아버지 이삭 또한 장자인 에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심히 곤비해’ ‘죽게 된’ 형 에서의 형편을 이용해 장자권을 넘겨받게 되었고, 급기야는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한’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장자권의 축복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했고, 망령된 그를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셨습니다.
그는 버린 바가 되어 영영 하나님의 길에서 떠난 자가 되었고, 그의 후손 에돔 족속은 사단과 한 패가 되어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이스라엘 민족을 핍박하고 미워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미워하고 대적하므로 하나님께서도 에서와 그 후손들과 그의 편에 선 자들을 미워하셨습니다.
3.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13)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 또한 아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육의 존재이기에 당장 오늘 일도 알 수 없고 내일 일도 내일이 되어야 알 수 있는, 시간의 지배를 받고 사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적 존재이시기에 모든 걸 다 아시는 분이고, 야곱과 에서가 서로 어떤 길을 택하고 어떻게 갈릴 것인지도 다 아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침묵하지 않으시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다.’고 미리 말씀(예언)을 하셨습니다.
어미 리브가를 통해 미리 말씀을 하심으로써 본토와 아비 집을 버리고 이삭을 쫓아 나온 믿음의 어미 리브가를 통해 영적 교양과 양육을 받게 하셨고, 들사람의 기질을 더 사랑했던 이삭의 편애에서 야곱이 보호 받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차자인 야곱 자신은 장자권을 결코 바랄 수 없는 자였지만, 어미 리브가를 통해 주신 약속(언약)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셨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때에 오직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야곱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37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40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41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42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43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창30:37-43)
10그 양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11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31:10-13)
야곱은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나무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것들을 양 떼 앞에 둔 것은 미신적 행위나 맹목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비록 그럴 만한 능력이 없지만 오직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믿음,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개입하심을 바라고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 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약속을 따라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야곱이 속임을 통해 장자권을 얻었지만, 그의 믿음을 보셨기에 그를 사랑하셨고, 그를 통해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야곱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시아버지 유다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은, 세상 눈 육의 눈으로 보기에는 불륜을 행한 다말이었지만, 그의 믿음을 보셨기에 그를 통해 언약의 후손을 이어 가셨습니다.
비록 이방 족속의 기생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자였기에 기생 라합을 통해 예수님을 예표하는 다윗 왕이 나실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모압 족속이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이방의 과부였지만, 시어머니의 믿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쫓은 룻을 통해서도 다윗 왕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비록 왕과 간음한 여자였지만, 왕(예수님)의 후손을 얻고자 열망하는 밧세바를 통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이 나실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야곱의 후손이요,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셨고, 기뻐하셨기에 사랑하셨고, 마침내 그들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약속하신 구원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4.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믿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로마서를 관통하는 주제는 믿음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 의를 말하기 위해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였고, 할례와 율법을 통해, 그리고 4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어떻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로마서를 꼼꼼히 다시 읽어 보세요. 특히 3장과 4장은 꼭 읽어 보세요.).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4:16)
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6-29)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되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도 아니고 할례도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인데, 거기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별이 있을 수 없고 차별도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유대인으로, 여전히 율법과 할례와 절기와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유대인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었고, 그 언약하심을 따라 그들 민족을 통해 예수님이 오셨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함으로써 마치 애굽의 바로와 같이 강퍅케 되었고, 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야곱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고,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 공동체(교회)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바울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떻게 장자권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는가?’
‘야곱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는가?’
‘왜 에서는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았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설파합니다.
야곱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되었던 것처럼, 이방인들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율법을 고수하며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기를 고집하는 이스라엘,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음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배척하며 영접하기를 거부했고,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음에도(롬3:21-22)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잘못된 지식과 자신들의 잘못된 열심과 자신들의 잘못된 의를 고집하며 하나님의 의(믿음으로 말미암는)에 힘써 복종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2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2-4)
이는 곧 에서의 망령된 행실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는 장자의 권리를 갖고 태어난 자이지만, 그 스스로 장자권을 멸시하고 경홀히 여김으로써 영원한 축복을 내쳐 버렸듯이, 그처럼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을 멸시하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장자권의 축복은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이방인과는 달리(엡2:11-12), 하나님이 택하신 장자와 같은 이스라엘 역시도 당연히 받아 누릴 장자권의 축복을 그 스스로 버렸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그 축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자기 행위와 자기 의를 따라감으로써 그것을 놓쳐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행한 할례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약속도 없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별하지 않고 첫째로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롬1:16)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던 아브라함처럼, 야곱처럼, (율법을 통해) 자신에게는 의가 없고 오직 멸망당할 죄인임을 깨달아 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바로 만세 전부터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인데, 율법을 통해 자신에게는 의가 없음을 더욱 깨달아(롬3:20) 예수님께 무릎 꿇어야 할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5.
사실 예정론은 바른 가르침 안에 있지 않으면 비록 그가 신학 박사이고 목사라 할지라도 쉽게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특히 선악과 사건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대하여는 성영님의 계시가 아니고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인데, 선악과부터가 막혀 있으니 어찌 창세 전부터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칼빈이라는 거짓 선지자가 등장해서 자기 머리에서 나온 인본의 생각, 즉 사단이 가져다준 것들로 전선택설이니 후선택설이니, 하이퍼 칼비니즘이니 하는 온갖 이론들을 만들어서 공세를 퍼 부으니, 누군들 그 가짜 복음에 속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 자신부터가 그런 거짓 복음에 속아서 수십 년을 헛되이 믿어 온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다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으니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말씀들을 훔쳐다가 나름대로 덧대고 짜깁기해서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거짓 확신을 얻고자 한, 강도 심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주 나중에 알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웬 은혜인지,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만나 바른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거짓 교리와 이론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은혜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으며,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제가 헵시바쁄라님께 하고 싶은 말은 그것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가는 사람이라면 예정론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성엽 목사님의 가르쳐 이르신 말씀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들으며 자기의 말씀으로 간직한 자라면, 칼빈 아니라 칼빈 할아버지가 와서 속인다 해도 분별하여 속지 않을 수 있고, 세상 신학과 교리가 말하는 소위 예정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짓되고 허황된 이론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론에 대해 질문을 하셨다면, 추측컨대 몇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먼저는,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가기는 하지만 건성건성 듣고 있거나, 아니면 듣기는 듣되 귀로만 들을 뿐 마음에 간직하여 자기의 것으로 삼아 경험하여 아는 말씀이 되게 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고 있든지, 아니면 아직 구원에 대하여 말씀과 성영님으로 말미암는 확증이 아직 없든가.
저의 말이 몹시 언짢게 들릴 수도 있지만, 부디 언짢게만 여기지 마시고 이번을 계기로 목사님의 말씀 안으로 확실하게 들어와 성경의 뜻을 잘 깨달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성영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신성엽 목사님의 가르쳐 이르신 말씀으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른다고 하셨습니다.
듣겠느냐, 듣지 않겠느냐, 둘 중 하나만 있을 뿐 중간지대는 있을 수 없다고 하셨고, 저 또한 그 말씀에 아멘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자기 자신이 알곡인지 쭉정이인지는 목사님의 가르쳐 이르신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자신의 믿음이 진짜요, 자신이 알곡이라면, 이제 남은 것은 목사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여 듣고, 모든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고 경험하여 알기 위해 성영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왜 부득이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오직 성영님만은 아시고, 이것이 헵시바쁄라님을 사랑하는 저의 유일한 방식이요 저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저만의 생각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러나 아마도 헵시바쁄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1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2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3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4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5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1-5)
댓글목록
은혜로님의 댓글
은혜로 작성일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관계로 허겁지겁 써서 올렸더니
글이 좀 길어진 측면이 없지 않아 있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미처 넣지 못하고 빠진 부분도 있어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글이 또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글이 길어서
읽는 분들께 상당한 인내를 요구하게 된 점,
죄송하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짧게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류혜숙님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아마도 저의 글과 류혜숙님의 글이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성영님께서 개입하시고 인도해 주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제 개인적으로는 해 봅니다.
류혜숙님의 글과 함께 읽는다면
야곱을 통한 하나님의 뜻,
에서를 통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헵시바쁄라님께는 개인적인 사심은 전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헵시바쁄라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듣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사랑하고,
그에게는 제 간이라도 빼서 주고 싶은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소용되는 것이 있다면
제가 가진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다 팔아서라도 돕고 싶습니다.
취미와 미래의 꿈까지 다 팔고 저당잡혀서까지 다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신성엽 목사님을 통해 보내신 성영님의 말씀을
목숨처럼 귀히 여기지 않거나
귀로만 듣는 사람,
머리로만 듣고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샀다.'는 말씀이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이기에
생명의 말씀을 대충대충, 적당히 여겨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헵시바뿔라님의 댓글
헵시바뿔라 작성일
은혜로님을 통해 말씀하신 삼위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올려 드립니다.
질문을 올려놓고 챙피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자 먼저 깨달으신 분들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성영님께도 계속해서 구했습니다.
결과는 제 믿음의 부족이였어요.
1년여 넘게 신목사님의 말씀을 들어오면서 의문과 확신을 반복해 왔습니다.
심영깊은 곳에 쓴뿌리는 제거하지 못한채 의문의 가지 치기만 해오니
인본적이고 세상적이고 사단적인 것들이 계속 계속 올라오는 거예요
아직까지 깨어지지 못한 심영의 쓴뿌리를 제거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던거지요.
말씀을 들으면서 선악과사건이 제일 힘들었고 그 다음이 예정이였어요.
왜 나는 이해되어지지 않을까 성영님께 구하고 또 구했어요.
그러다 용기내어 질문을 올렸지요. 다른분들의 답변도 시원하지도 않고
제 속에서 그래 이거다라는 확신이 안드는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길 '창세기' 책을 사서 천천히 다시 읽어 갔지요.
성영의 답은 아주 간단했어요.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사울과 다윗....
즉, 믿음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자, 육을 쫓아 사는 자와 영을 쫓는 자
하나님의 예정이란 것이 누구는 천국가고, 누구는 지옥가는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라는 것
누구든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으면 구원받는 것
성영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기 까지 날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
항상 말씀안에서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빌3:12)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로님을 통해 저의 심령을 통찰하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삼위하나님께 감사와 영광돌리며 은혜로님께도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할렐루야!!
은혜로님의 댓글
은혜로 작성일
헵시바쁄라님을
승리의 길로 이끌어 주신
우리 아버지와 아들과 성영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