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9:13 예정론 논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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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류혜숙 작성일16-05-17 00:55 조회9,865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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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빌 3:12절 (내가 이미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쫒아 가노라) 말씀에 위치를 정하고 예수님 오실 때까지 그 믿음을 지키기를 원하는 자로서 저의 생각이 아직 온전치 않을수도 있으므로 홈피에 글을 올리기를 늘 조심스러워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다만 서로 믿음의 진보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정론에 대한 질문중 마지막 롬9:13절에 대한 말씀입니다.
롬9:13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질문자님은 이 말씀을 복중에서부터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생각하고 계신것 같은데 그 근거가 무었일까요?
그리고 에서가 구원 받지 못한것은 예정해 주시지 않은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생각되시는건 아닌지요?
이 말씀은 복중에서 심하게 싸우는 쌍둥이들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가 어쩌면 좋을지 호소하던 리브가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그 아이들은 문제 없이 잘 태어나서 두 민족을 이룰것이라고 안심시켜 주셨고 큰자가 작은자를 섬길 것이라는 예언적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기리라고 하셨는데 실지로 에서가 야곱을 섬긴적도 없으므로 이것은 그 때만의 일이 아닌 영적 싸움을 예고하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복중에서부터 나는 누구를 택했다고 말씀하신적이 전혀 없음에도 우리는 사단과 사람이 합작한 거짓 설교들을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지도 않고 하나님을 오해하는일이 너무 많았던것 같습니다.
롬9:13절의 이 말씀은 창세기에서 리브가에게말씀하신것이 아니고 말라기1:2-3에서 신앙의 타락이 들어온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백성들에게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에서를 들어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오바댜는 한장으로된 에돔에 대한 묵시입니다.
1장3절에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곳에 사는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 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돔에 대한 심판이 무섭게 선포 됩니다.
그러면 에서가 어떤 자였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을 선포하셨을까요?
창세기25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에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삼대째가 되었는데 두 민족이 복중에서부터 싸웠습니다.
그리고 강하고 이긴자가 먼저 터치고 나왔습니다.
27절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라는 표현에 무언가 기억나지 않습니까? 창세기10 장에 노아의 후손중에 가나안의 아비 함의후손중에 니므롯이 나오는데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라고 했고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는말이 속담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냥꾼에 대한 풀이는 신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으셨을 줄 압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사냥꾼이었다는 말입니다. 실지로 어떤 사람을 들어 사냥꾼이라고 말씀 하신 것은 니므롯과 에서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니므롯을 설명할때 특이한 사냥꾼이라 표현하신 것은 에서가 누군가를 설명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이삭의 장막에 머무르지 않는 들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도 제 힘으로 살아갈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복을 소홀히 했다는 말입니다.
교만 했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 조부아브라함이 아비 이삭을 위해 하란까지 종을 보내어 리브가를 데려오게하여 아내로 맞은 것을 알텐데도 택함받은 자의 거룩에 대해 소홀히 여기고 헷족속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여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즉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야함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타락해 버렸다는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 제목의 말씀을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에서는 살인자입니다.
실지로 살인은 저지르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키셨으므로) 그 마음은 이미 신앙의 계보를 이어갈 야곱을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아마 뱃속에서 부터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마치 가인이 나가서 놋 땅에 거했듯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을 떠나서 세일산에서 에돔 족속을 이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나 버렸다는 말입니다.
창세기36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아직 애굽으로 내려가기도 전에 에돔땅에는 왕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거부하고 세상의 왕을 세웠다는 말 입니다.
그때도 야곱은 가나안땅에 거하고 있었슴을 37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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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성경이 밝히 말씀하고 있는데도 아직도 복중에서 부터 택하시지 않아서 에서가 구원의 반열에 들지 못한 것이라고 하나님을 탓하시지는 않을줄 압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신앙의 계보를 이어오는 믿음의 사람 옆에는 반드시 여자의 후손을 오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단의 계보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에서가 바로 그런 자였으며 약속을 가진 유대 민족이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을 부인하고 에서와 같이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것처럼 교만을 버리지 않음을 애통해하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하심과 친히 오셔서 구원을 이루어 주심을 통해서라고 외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에서와 같이 여기실 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다,아브라함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지 않으면 사단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질 죄인 들입니다.
노아 시대에 물로 심판 받은 자들과 무었이 다르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열심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주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으로 예수님이 오시고 저희에게까지 구원이 이른 것입니다.
사실 왜 야곱만 택했냐고 하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에 서 우상을 섬기던 곳에서 왜 아브라함만 택했냐고 하나님께 항의 하는것과 무었이 다르겠습니까? 토기장이의 비유도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다 멸하셔도 할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하시고 구약의 긴 시간동안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약속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통하여 결국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원을 이루어 주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롬9:22 에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그때에 멸해 버려도 할말없는 죄인들을 위해 오랫동안 참고 관용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믿음의 사람들을 택하셔서 일하셨구요....그들을 23절에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죽어도 마땅한 자, 사단과 함께 멸하셔도 할말이 없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은혜로 택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로 예비하셨답니다.
저도 신 목사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늘 하나님께 대한 의혹이 있었습니다.
창세기의 선악과,
욥의 고난,
노아의 홍수 등등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인본의 생각으로 성경을 보다보니 믿는다고 말은 했지만 영은 고통하고 아무런 믿음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신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말로 할 수없는 믿음의 변화가 일어 났습니다.
여기서 그것을 다 말할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삼위일체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히 알게되었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오직 선하심 밖에 없으신 그 온전하신 사랑을 알게 되니 그 감사를 올려 드리며 더 잘 알고 사랑하고 싶은 소원을 올려 드리니 차츰 성영님의 눈으로 성경을 깨닫게 되고 말씀 구절구절 속의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노아시대의 일이나 욥의 고난도 은혜로 알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헵시바 쁄라님!
하나님을알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셨고 선하신 성영님께서 도우시려고 함께 계시니 성영님을 의지하여 신목사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반복 들으실것을 권해 드립니다.
그러다보면 어느날 큰 영적 도약을 이루어 주신 성영님의 도우심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신목사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추수하실 알곡이 되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약1:16-17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조물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쫓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아멘 아멘!
댓글목록
은혜로님의 댓글
은혜로 작성일
류혜숙님!
감사합니다.
류혜숙님의 글을 통해 특히 에서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과
야곱과 에서의 싸움이 뱃속에서부터 치열한 영적 전투였음을 보면서
더욱 경각심을 갖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믿음에 큰 유익을 얻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헵시바뿔라님의 댓글
헵시바뿔라 작성일
류혜숙님을 통해 말씀하신 삼위하나님께 감사와 찬양드립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글을 올렸지만 많은 분들의 답변을 통해 말씀의 해갈을 얻으것 같아
감사하고 또 감사드립니다, 아직 인본주의적 쓴뿌리가 남아서 계속 계속 가지를 쳐서 될일이 아니라
근본 뿌리부터 캐내고 아버지 말씀으로 다시 채워나가겠습니다.
사랑으로 답변해 주신 류혜숙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구원님의 댓글
구원 작성일
류혜숙님의 답글 많은 은혜 받았읍니다.
구약의 장자는 예수님을 의미 합니다
에서는 교만하여 예수님을 판자입니다
가룻유다도 교만하여 예수님을 팔았읍니다
선한양님의 댓글
선한양 작성일
구원님,
저는 구원님에 대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고,
저 역시 신성엽 목사님의 가르쳐 이르시는 말씀을 듣고 배워가는 입장일 뿐이지만,
구원님의 댓글을 읽으면서 조금 의아심이 들어서 몇 자 남기고자 합니다.
구약의 장자는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하셨는데요,
이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장자가 아니라 장자권이고,
장자권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에서와 유다가 교만하여 예수님을 팔았다고 하셨는데요,
과연 맞는 말일까요?
이 또한 맞는 말 같지만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의 부족하고 짧은 지식으로 일일이 답을 하기보다는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들려드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목사님의 가르쳐 이르신 말씀을 인용코자 합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육을 위해 사는 것이면 예수님 필요 없는 겁니다. 육으로 지은 모든 죄들 때문에 예수님이 피 흘려 주셨는데, 그런데 여전히 육신적으로 살겠다고 한다면 것은 예수님 필요 없는 겁니다. 예수님과 코드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6절 17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육을 위해 한 그릇 식물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렸는데 그 뒤에 장자의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 흘리며 간청을 했어도 그는 이미 그 엄청난 장자의 명분을 잠시 받는 육체의 배고픔 때문에 팔아 버렸으므로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어 장자의 명분, 즉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자가 돼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사건들을 통해서 이같이 육의 것 때문에 하나님의 엄청난 자녀의 명분과 은혜를 귀한 줄 모르고 파는 것처럼 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 그러므로 두려워하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한 그릇 식물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린 에서와 같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로 삼 년 반 동안 동고동락하며 따라다녔으니까 예수님 만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가룟 유다가 예수님 만난 것입니까? 만나지 못한 것입니까? 예수님 만난 것 아닙니다. 그러면 왜 만나지 못한 것입니까? 인간 눈으로 볼 때는 당연히 예수님 만나 삼 년 정도를 함께 생활했으니 만난 거지요.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영으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은 세상을 자기 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육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자기 자신은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 보지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죄인으로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인 것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속에 육의 욕망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에서 만족을 얻기 위해 예수님 따라다녔고, 그의 속의 모든 관심이 돈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판 자가 된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돈 때문에 팔아 버렸다는 말입니다."
- 성전 <물두멍(3)>에서 -
유다에 대해서는 다음의 여러 성경 말씀들이 한결같이 말해 줍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
"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마26:14-16)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막14:10-11)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눅22:3-6)
성경의 모든 뜻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영님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보이시고자 하는 뜻과 목적과 방향이 같아야 함을
신 목사님께서는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거짓이요, 인본이요, 사단적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원님의 글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교묘히 다른 것들을 끌어다가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의도를 가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님 자신의 생각, 자기 머리에서 나온 것들을 말하면서
마치 그것이 성영님이 주신 것인 양,
아주 대단한 것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과연 구원님 자신의 생각일까요?
조금 은혜 받았다고, 남보다 조금 깨달았다고 은근히 우쭐한 마음(자기 자랑)을 갖게 되니
그 틈을 사단이 치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말씀의 뜻을 왜곡하고,
그것이 결국은 사람들의 마음을 흐리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뜻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결국에는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결국에는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단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구원님,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구원님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고,
구원님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가는 사람으로서
구원님이 좀 더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지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부득이 댓글로나마 안타까움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인본(사단적인 것)에서 나오는 것들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것이면
앞으로는 글 올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구원님 스스로 하신 약속이니 약속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