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망 > 영광을 돌립니다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영광을 돌립니다

Home > 게시판 > 영광을 돌립니다

 

영광을 돌립니다

책망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은혜로 작성일15-08-07 17:46 조회10,586회 댓글17건

본문


1.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근래 몇 년 동안 받은 책망만큼 많은 책망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이런저런 책망을 받기도 하고 젊은 시절(지금도 젊긴 하지만^^)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을 때는 리더들로부터 많은 책망과 훈계를 받기도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의 책망은 진짜 책망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교회에서의 책망은 직분을 잘 감당(?)하는지 여부와 목회자의 권위에 절대 복종하는지 여부에 따라 책망의 횟수나 강도가 달라지는 만큼, 그 책망은 참된 책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종’을 빙자한 종교 행위에 불과했다는 것이 지금의 제 생각입니다.


교회에서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니 무조건 충성, 봉사해야 하고, 목회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니 절대적으로 그 권위에 복종하고 따르는 것이 신자의 미덕이라고 배웠고, 내 자신도 그게 옳은 것인 줄로 알아 마땅히 행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오래도록 충성, 봉사하던 교회를 제 발로 걸어 나오게 되면서 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목회자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시 교회에 나오라는 책망인지 부탁인지 모를 그의 강압적 권유도 무시했습니다.

제 생전 처음으로 목사의 말을 거부한 것입니다.

목사의 말이라면 하나님의 말로 알아 싫든 좋든 절대 따랐던 제가 그의 말도 권위도 거부하며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만나 듣게 되면서 제 영이 교회 목사의 설교를 도저히 들을 수 없다며 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은 잘 몰랐지만, 제 영만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이 좋아 기쁨으로 듣고 가는 것일 뿐, 그렇게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조용히 교회생활과 병행하는 것일 뿐이었지만, 그러나 제 영만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은 그런 거짓 가르침들, 영혼에 생명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멸망으로 이끄는 말들, 믿음의 방향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그 수많은 종교 행위들을 도저히 참고 있을 수 없다며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럼에도 그 고통의 호소를 알아듣지 못하는 제게 그 어느 주일 날 드디어 제 영이 제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 너무 괴로워! 이런 거짓 설교를 듣고 앉아 있는 것이 너무 역겹고 괴로워! 더 이상은 여기 앉아 있고 싶지 않아!”

영의 고통 하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아마도 알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하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인 줄을.

그 어떤 소리보다, 그 어떤 외침보다 크다는 것을.

비록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 없는 소리이지만,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들린다는 것을.

제 영의 고통 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아, 이제 교회를 떠나야 할 때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예배가 끝나고 신발의 먼지를 탈탈 털면서 교회 문을 나왔고, 집에 돌아와서는 한없이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에 펑펑 눈물을 쏟았습니다.

다닐 교회가 없다는 그 안타까움, 절망감, 이제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그 두려운 마음에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쳐 전하는 교회가 없다는 그 사실에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내가 그토록 충성하던 교회, 내가 그토록 사랑하여 봉사하던 교회, 어찌하든 믿고 따랐던 목회자, 피붙이보다 더 가깝고 사랑했던 지체들……그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슬펐던 것은 그 모든 것, 참인 줄 알고 따랐던 그 모든 가르침들이 어쩌면 다 가짜였다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적어도 한 달 전부터 찬양이며 연극이며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고, 준비하여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신앙은 악한 것이라며 그렇게 신자들을 열정과 열심으로 지도하며 독려했던 목회자의 가르침, 그 가르침이 가짜였다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인본의 열심과 종교심에서 나온 것으로 교인들을 가르치고 교회를 이끌어 간 그 모든 것이 가짜였다는 것.

성찬식에 사용하는 빵을 제과점의 식빵으로 베풀며 교인들에게 한 움큼씩 떼어 주며 했던 그 모든 권면과 축복이 가짜였다는 것.

부활과 생명과 영생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검은 색의 가운을 걸친 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이 터져라 외쳤던 그의 설교가 가짜였다는 것.

그리스도인의 청렴하고 청빈한 삶을 가르치면서 제직회의 결정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을 핑계 삼아 비싼 승용차를 선물로 받았던 이중적인 모습.

남은 유족들을 위로하는 자리에 빠지는 것을 도리어 죄로 여기며 장례식장을 누구보다 열심히 찾아다니며 경건하고 엄숙히 드리던 그 모든 예배가 다 가짜였다는 것.

셀 수 없이 많은 가짜와 거짓의 것들을 속속 깨닫게 되고, 희미한 것들을 밝히 보게 되면서, 가짜와 거짓의 종합 백화점 같은 곳이 바로 교회라는 그 사실이 저를 더욱 슬프게 했습니다.

교회라는 간판만 달았을 뿐 영혼을 도적질하고 멸망으로 이끄는 강도의 소굴과 다름없는 곳을 사랑하고 충성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부끄럽고 한없이 미워서 또 한없이 펑펑 눈물을 쏟았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또 펑펑 울었습니다.

늦었지만, 바로 알게 되었고, 돌이킬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고 이 얼마나 큰 복이 내게 주어진 것인가 싶어 한없이 감사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2.

베드로는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가 학식이 높다거나 세상적인 지위나 명예가 높다거나 인간적인 업적이 많아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가진 성품, 제자로서 갖춘 그의 덕목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 학문 없는 범인입니다(행전4:13).

세상 기준으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나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택함을 받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특히 베드로를 귀감으로 삼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책망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베드로만큼 책망을 많이 받은 제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께 그리하지 마시라고, 인간적인 사랑과 충성에서 예수님을 만류했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깨닫지 못하고 인본의 생각과 눈으로 판단을 하게 되고, 그것이 곧 사단적인 생각이기에 결국 사단이라는 말까지 듣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 내게 사단이라고 했다면, 아마도 심장이 멎을 정도로 충격을 받아 시험에 빠졌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큼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자기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충성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예언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른다고 아예 저주하며 맹세까지 합니다.

위기의 순간, 자기 목숨이 달린 경각의 순간에 자기 목숨보다 사랑한다던 예수님을 부인하며,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저주하며 맹세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아직 성영께서 임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직 성영이 임하시기 전, 3년여 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제자로 살았던 제자들은 이제 딱히 할 일이 없어졌고, 달리 방법도 없어 다시 갈릴리로 고기 잡으러 떠납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던 예수님의 약속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베드로가 앞장서서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니 다른 제자들도 너도나도 따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어느새 동이 떠오르고,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평생을 바다에서 뼈가 굵은 그 갈릴리 어부들이 날이 새기까지 단 한 마리의 피라미 새끼도 잡지 못해 허탈해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고, 그 말에 순종해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나 되는 고기들이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워 떡과 고기를 준비해 놓고 제자들을 기다리셨습니다.

제자들이 배불리 먹고 나자 예수님은 비로소 베드로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사랑하는지 물어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친히 주신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가 아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시며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아가페의 사랑(정확한 표현은 아가파오)으로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두 번 다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며 필레오의 사랑으로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도 역시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했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필레오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부활을 목격했지만, 성영이 아직 임하시기 전,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은 여전히 필레오의 사랑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베드로를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고, 비록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그를 용서하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내가 안다. 그 사랑이 아직도 여전히 필레오의 사랑일 수밖에 없는 것을 내가 안다. 그래서 나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내가 안다. 그러나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 오직 성영이 임하시면 네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요, 네가 두 팔을 벌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결코 나를 부인하지 않으며 나를 사랑하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내가 안다. 그 사랑이 여전히 필레오의 사랑인 것을 내가 안다. 그러나 너를 향한 나의 사랑, 그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이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 아직 이 우리에 들지 않은 수많은 내 양들이 있으니, 그들을 먹이라.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치고 먹이라.”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세 번이나 용서하시며 완전한 사랑으로 품어 주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베드로는 성영이 임하신 후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게 되는 복음 사역의 핵심 인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는 그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 터 위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는 일에 그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그 베드로를 택하여 세우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택하심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한 사람이 곧 베드로 자신입니다.

베드로는 여러 번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많은 책망을 들었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했기에 자기 스스로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책망 받을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돌이킬 줄 아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에 넘긴 가룟 유다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과는 달리, 어쩌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만큼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일이 잘못된 것임을, 자신이 잘못 판단하고 잘못 행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시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을 깨닫기는 해도 그것을 시인하며 돌이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잘못을 내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지적하여 깨닫게 될 때에는 그것을 시인하며 돌이키는 게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남이 나의 잘못이나 연약함을 지적해 주었을 때, 그 부끄러움과 굴욕감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 수치와 굴욕을 극복한다는 것은 잘못한 그 사실을 시인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렇습니다.

자존심이 무엇인지, 완고하고, 언제나 남보다 더 낫기를 바라고, 겸손한 척 언제나 대접받기를 바라고,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으로 인정받기를 바라고, 쉽게 꺾이지 않고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게 바로 자존심입니다.

그렇기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되면 쉽게 상처받고, 토라지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게 사람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많은 책망, 그 많은 자존심 상하는 일들 가운데서도 언제나 돌이킬 줄 알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았고, 알량한 자존심을 굴복시킬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날지라도 자신만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죽을지언정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겠다며 호언장담했던 그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랑이 가짜인 것처럼 드러나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이나 연약함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존심에 갇혀 고집 피우지 않았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털어내고 다시 일어설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사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예수님께 상처받고 쓴 뿌리를 품기보다는 도리어 자신의 인본의 생각을 돌이키고 더 사랑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런 베드로였기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그를 잡고 흔들 때에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위해 기도하시며 그를 끝까지 품어 주셨습니다.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한 제자였지만, 역시 세 번이나 용서하심으로 그를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책망을 받을 줄 알고, 자신의 잘못이나 연약함을 인정해 돌이킬 줄 아는 것, 어쩌면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일찍부터 아시고 그를 택하여 세우셨는지도 모릅니다.


3.

베드로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갈라디아서 말씀을 보면서 하게 됐습니다.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쫓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갈2:11-14)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예루살렘에서 오는 유대인들에게서 혹시 오해를 받을까 싶어 자리를 뜨자 이로 인해 함께 있던 많은 유대교 그리스도인들도 외식을 하게 되었고, 성영과 믿음이 충만한(행전11:24) 바나바까지 유혹을 받아 외식하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예수 안에서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교회 안에는 여전히 유대교적 전통과 율법적 요소들이 남아 있었고, 이로 인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뉘고, 믿음이 아닌 율법적 행위들을 통해 구원 받고자 하는 외식의 믿음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그때에, 그 누구보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전해야 할 사도 베드로가 도리어 사람들의 믿음을 연약하게 하여 시험에 빠지게 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의 면전에서 그를 책망했습니다.

바울 역시 사도이긴 하나 베드로에 비해서는 사도적 권위가 약했던 그때에, 감히 사도인 베드로에게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를 책망했던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바울은 사도인 베드로를 면전에서 책망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혹시 베드로의 사도적 권위와 자존심에 손상을 줄까 염려되어 사람들이 없을 때 은밀히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면전에서 책망했습니다.

베드로의 사도적 권위며 자존심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일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비록 사도라 할지라도 가리지 않고 분명하게 지적해 바로 잡고자 했던 것입니다.

과연 바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전20:24) 했던, 바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바울처럼 행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는 면전에서 책망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적인 정이나 관계를 생각한다면 백번을 생각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믿는 자들이 ‘기둥같이 여기던’(갈2:9) 사도였습니다.

그런 사도 베드로에게, 오직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바울은 사도 베드로를 그 자리에서 바로 책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책망한 바울보다 책망 받은 베드로에게 저는 더 주목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모든 사람들이 기둥처럼 여기는 사도인 자신을, 아직 애송이 사도에 불과한 바울이 자신을 책망을 합니다.

모임이 끝나고 단 둘이 있을 때도 아니고, 누군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듣게 된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책망을 받는 그 상황, 그 상황에서 과연 사도 베드로는 어떠했을 것인지, 그 책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했을 것인지,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면서 어쩌면 베드로였기 때문에 바울의 책망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해 봅니다.


‘만일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얼굴이 화끈거리고, 무안함에 어디 숨을 구멍이라도 없나 찾지는 않았을까?

저 따위가 누구라고, 감히 나한테?

저로 인해 수많은 복음 증거의 일이 나타난다고, 그래서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 감히 내 면전에서 저렇게 하는 것인가?

저만 복음을 전하나?

저만 복음을 아는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내게 그럴 수가?’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기에 알 수 없지만, 그 일로 인해 바울이 욕을 먹고 그의 권위가 약화되었다거나, 소위 왕따를 당했다거나, 이 일로 인해 교회가 시끄러워졌다거나 하는 일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책망을 들었을 뿐 아니라 그의 책망대로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은’ 자신의 연약함을 회개하고 도리어 바울의 책망을 교회 전체에 경계의 본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책망에도 자존심 상해하며 쉽게 토라지는 내 자신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과 예수님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내 자신의 자존심을 먼저 생각하고, 책망을 달게 받기보다는 도리어 쓴 뿌리를 품게 되는 쫀쫀한 내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책망하는 사람이 혹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교회 안에서의 포지션이 더 낮거나 할 때면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폭풍 같은 분노를 감추기 위해 얼굴에 미소를 띠느라 바쁩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나 영적 체험이나 모든 면에서 내 자신이 그보다 더 나은 것 같은데, 나보다 못한 사람이 책망이라도 하게 되면, 이건 뭐 마음에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눈에 뵈는 것이 없고, 보이는 것이라곤 바닥에 떨어진 내 자존심뿐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고, 머리 되신 예수님을 세우기보다는 꺾인 내 자존심 세우기에 더 바쁩니다.

이것이 내 모습, 책망을 받지 못하는 연약한 내 모습, 가룟 유다와 같은 내 모습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4.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만나면서 이런저런 책망을 많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저를 책망했습니다.

믿음의 방향을 잘못 갖게 하는 수많은 거짓 가르침들에서 벗어나야 할 것에 대해, 그 책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자신의 변화되지 않은 모습이 도리어 복음을 가리고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한다는 것을, 말씀이 저를 책망했고, 제 양심이 저를 책망했고, 믿음의 선배들이 저를 책망했습니다.

늘 부정적이고 비판하는 것이 습관처럼 돼 있던 언어 습관이 저를 책망했습니다.

일터에서 사람들의 그릇된 태도나 말, 행동이 저를 책망했습니다.


‘너는 그렇게 하지 마라.’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을 타산지석으로만 삼고 절대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마라.’


가정에서 남편의 변화되지 않는 삶이 저를 책망했습니다.

예전의 제 모습,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알지 못했기에 늘 죄와 짝하며 변화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았던 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전에는 너도 저와 똑같았다. 네가 변화되기 위해 수십 년이 걸렸고, 지금도 변화되기 위해 애를 쓰는데, 하물며 믿지 않는 네 남편은 오죽하겠느냐?’


무엇이든 숨기지 않고 재잘거리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가정에서의 저의 드러나지 않은 행동이며 말이며 태도들을 사람들에게 까발리며 저를 책망했습니다.

점점 자라가며 날이 갈수록 머리가 커가는 아이들이 저의 말이며 행동을 책망했습니다.

모든 것이 저를 책망했고, 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책망은 영적 권위자에게서 받는 책망입니다.

때때로 잘못 판단하거나 잘못 행동했을 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복음의 뜻을 왜곡할 때, 어김없이 영적 지도자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호된 책망이 있었고, 저는 또 ‘깨갱~’하며 폭풍 속의 낙엽처럼 흔들렸지만, 떨어지지 않고 나무에 붙어 있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 나무는 포도나무인 예수님이신데,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전 같으면 떨어져도 금세 떨어져 저 혼자 시험이라는 시궁창에서 나뒹굴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바른 가르침의 말씀을 만난 후부터는 오직 예수님께만 내 중심을 두어야 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책망하는 분의 책망이 오직 사랑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행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지는 않을까, 행여나 복음을 가리지는 않을까, 행여나 예수님의 영광을 훼손하지는 않을까, 모든 것이 예수님을 높이고 복음을 바로 세우기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만나기 전, 교회에서나 선교 단체에서 이런저런 책망을 많이 받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책망은 책망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다 인본의 것에서 나온 책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 운운하며 말할 수 없는 짐과 의무감으로 사람들을 굴레 씌웠고, 끝없는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의 관계 맺음 없는 의무감에 기초한 복종을 요구했고, 그에 어긋나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늘 책망이 뒤따랐습니다.

댓글목록

할렐루야1님의 댓글

할렐루야1 작성일

무더운 불볕더위에 한차례 시원한 소낙비와도 같은 말씀을 하시니
시원하게 들었습니다. 어찌하면 이런글을 쓰실수 있는지...

믿는자들로 쓰는 글은
쓰는이의 심영안에 성영께서 함께 하셔서 듣고 보는자들로
은혜를 끼치도록 하시게 하는것 같습니다.

또한 글을 읽다보니 은혜로님의 마음안에 깊은곳에
순수한 깨끗함의 사모함과  겸손함의 마음바탕이 있으시니
많은 책망의 말씀에도 넘어지지 않으시고 순종하시며
더욱더 깨달아 견고한 믿음으로 성장하고 계시고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쓰신 말씀에  저도 공감가며 믿음안에서의 책망을 듣는다는것은 곧 성영님의 은혜인거 같습니다.

그어떤 상황 그어떤일 어떤위치 어떤과정이든 모든 벌어지는 일들로 인한
것들로  나자신을 먼저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보는 계기로 삼고,
깨달아 감사히 겸손히 책망받는 말씀으로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야겠습니다.

항상 깨닫기를 내탓  내잘못 내부족 나를 비춰보며
나자신부터 점검하며 돌아보며 믿음을 위해 달려가야겠습니다.

구원님의 댓글

구원 작성일

할렐루야 모든영광 삼위 하나님께만 영공 돌림니다

은혜로님의 간증글 잘읽었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보면 나의 하나님 입니다.
그러나 사람으로오신 예수님을 보면  나의 구세주요 나의 친구요 나의 형제로 오셨읍니다.
그리고 교회로보면 그는 우리의 머리되시고 몸이시며 우리는 그의 몸에 붙은 지체입니다

모든 지체는 머리의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우리는 다른것의 좌우되지 않고 머리되신 예수님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몸안에서 하나되고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외에 다른 어떤것도 머리가 될수가 없는 것이죠.
예를 들어 왼팔이 오른팔보고 명령을 할수가 없을 것입니다.
머리에서 판단하여 서로 협력 하도록 명령을 내려 움질일거라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가난한자입니다.
그것을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읍니다. 그예로 그는 자기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죄인 인것도 알았고 구세주와  예수님 말씀이 영생인줄도 알았읍니다.

그러나 그는 알았을뿐 확실히 깨닫지는 못헀읍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적으로는 그 이상의 영의 것은 깨달을수 없기 때문인 것이라 생각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예수님이 죽으러 간다하니까 사람의 생각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랬을 것이라 생각 합니다.
"얘, 너 네가 나를 알고 지금까지 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네안에서 변할수있는 네 지식으로 안것이다.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너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러니 네가 닭울기 전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
한번이나 두번 부인 한다면 베드로도 예수님에 하신 말씀이 우연히 맞춘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 길로 인도 했다고 봄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번 물어 보신것은

베드로야 아직도 나를 사람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 하느냐 물었을 것이라 생각 합니다
베드로는 고민하여 주께서 아십니다 이제 제 생각 제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사랑은 예수님을 사랑 할수가
없다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내 생각으로 주를 사랑한것이 내가 주를 배반한것이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예수님이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이제 됬다 내양을 치라
다시말하면 내사랑을 입은자만이 나를 사랑할수있다 인간으로 사랑하는 사랑은 거짓사랑, 깨지는 사랑이다 하신
것이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사랑을 입고 내 양을 먹여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정이나 인간적인 사랑으로 해석하면 절때 안된다고 봄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과 같지 않다고 하셨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영광 받아야 하는 이유를 너무나 잘알고 계십니다.
그 영광이  참 진리이고 지극히 선한것이고 우리의 생명이요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성영으로 깨달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볼수있다고 봄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 받아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한없이 사랑하고 영광 돌려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평안이고 안식이며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아무것도 아님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사도의 권위를 내세워 요즘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자기가 예수님의자리의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선생이 되지 말고 스승이 되지말라 하셨읍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선생이요 스승이라 하셨읍니다.
바울이 베도로를 책망한것은 바울은 하나님 입장에서 책망 했다고 봄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당 한것이죠.

은혜로님의 댓글

은혜로 댓글의 댓글 작성일

구원님의 말씀대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책망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또한, 베드로가 바울의 책망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바울의 책망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로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책망하는 자이든, 책망을 받는 자이든, 그 중심을 오직 예수님께 두지 않으면 모두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혹 저의 글에서 특히 말씀에 대하여 잘못 해석하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책망)해 주시기 바랍니다.
썩 유쾌하지는 않겠지만, 책망을 달게 받아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어쨌든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제 아무리 사랑 사랑 해도, 오직 성영으로 말미암지 않는 사랑은 절대 온전할 수 없다고요.
우리로 사랑할 힘도 지혜도 능력도 주시는 분은 오직 성영님이시라고요.
인간적인 내 사랑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이라고요.
 
이번에 요한복음 21장을 다시 보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물질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내 아이들, 내 남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에 대해 저는 이렇게 답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물질을 사랑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물질에서 자유 할 수 있고 예수님을 위해 물질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내가 세상을 사랑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으로 족하기에 세상에 미련 두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
내가 내 가족을 사랑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도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나를 위해 기꺼이 내어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가족까지도 내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라고.
모든 것은 독생자를 내어주기까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 하늘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체로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절대적인 사랑, 아버지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셔서 이루신 예수님의 사랑을 다 아시고 증거 하시며 이루시는 성영님의 사랑, 아버지와 아들과 성영님의 사랑을 아는 것에서 출발하고, 맺어지게 된다는 것.
그렇기에 삼위 하나님을 알고(경험하고) 사랑하고 관계 맺는 것에 집중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쓸데 없는 것이라고.
세상살이, 그것 외에 그 어떤 것도 다 쓸데 없고, 똥보다 못한 것이라고.
그러니 내가 가진 물질, 시간, 에너지, 가능성....나의 모든 것을 오직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에 쓰고, 오직 삼위 하나님의사랑을 전하는 것에 써야 하는 것이라고......

구원님의 댓글

구원 작성일

아멘
우리가 하나님 사랑한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체가 되어 예수님을 사랑 하려고 한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이 없었다라면 베드로는 교만해 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교만을 깨우치기 위하여 베드로를 그 길로 인도 했다고 봅니다.

할렐루야1님의 댓글

할렐루야1 작성일

오우...!
깨달은분들의 말씀또한 자세히 주의하여 살펴
저는 더욱더욱 예수님 바로 아는지식으로 매진하여야 겠네요..^^

구원님의 댓글

구원 작성일

은혜로님의 글 표현에서
아가페니 필레오니 하는 표현은 크게 잘못됬다고 봅니다
성영이 함께 계신 것이면 왜 그표현이 잘못된 것이라는것을 알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세상사람들에 표현의 등급 입니다
세상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데 어찌 그사랑을 표현 하겠읍니까?
우리도 그같이 표현 한다면 세상사람과 똑같다고 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거기까지로 표현하는것입니다

그것은 내 지식을 과식으로 표현하는것밖에  없읍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님입니다 독생자 입니다 성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 입니다.
공의가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과 심판입니다
바로 전 성경에서 역사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그 표현이  적절치도 않고
크게 잘못된다는것 아시리라 봅니다
그냥 아버지의 사랑으로 표현 했으면 합니다.

제가 이렇게 쓴것은 지금 갑자기 생각해서 쓰는것 아닙니다.
사람의 판단으로 판단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공의로 판단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은혜로님은 충분히 판단하시리라 봅니다.

은혜로님의 댓글

은혜로 댓글의 댓글 작성일

구원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알고 있고,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구원님의 표현 또한 다 맞습니다.

그러나 조금 오해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하나님(예수님)의 사랑을 등급을 매기기 위해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21장의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 회복시켜 주신 부분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자
제가 갖고 있는 원어 성경을 살피게 됐고, 원어상 표현이 그랬습니다.
우리 말로는 다 '사랑'으로 돼 있지만 원어로는 그 표현이나 의미하는 바가 달랐고,
그래서 이왕이면 똑같은 사랑이라도 구분을 해 주면 좀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구분을 해줄 필요가 있겠다 싶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 의도와는 달리 읽는 이로 하여금 오해를 하게 한 것 같습니다. 
오해를하게 했다면 그 의도를 정확하고 적절하게 표현을 하지 못한 제 부족함 때문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가 무슨 지식을 자랑하고 저를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불필요한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가 염두해 두었던 것은,
비록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가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했고 그 사랑이 진실했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그 불완전하고 연약한 사랑을 말할(고백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런 베드로의 사랑을 예수님도 아셨기에 비록 그가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그 사랑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개인적으로 그 용서와 사랑을 경험케 하신 것이 아니라,
많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용서하시고,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은 통곡하며 회개를 했지만, 그럼에도 늘 그것이 부담이 되고 아킬레스건으로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성영님이십니다.
성영님께서 무너지고 넘어지고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랑을 온전한 사랑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분명히 '성영이 오시기 전'이라고 언급을 했고, 성영이 임하시므로 땅 끝까지 증인 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함으로써 성영이 '오시기 전'과 '오신 후'로 분명히 구분을 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대한 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저는 '성영'을 기준으로 이 부분을 보고 해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영님이 오시기 전, 예수님이 아직 승천하시기 전에 친히 베드로를 찾아가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고,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성영님이 오셔서 이루게 하셨다고 봅니다.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저 역시 많은 책망을 받았고,
오늘도 제가 미처 알지 못하거나 오해하고 있거나 돌이키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여러 가르침(책망)을 받았고,
또한, 저로서도 인간적으로는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공동체와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싫은 소리, 지적의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글의 말미에도 썼지만, 서둘러 마무리한 감이 없지 않아 덧붙이자면,
저는 책망을 통해 배웁니다.
잘못을 지적해 주고, 책망을 해 주실 때,
그때가 아니면 배울 기회가 없다는 것을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 부족하고 모난 모습들, 버리고 돌이켜야 할 것들,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기에,
때로는 얼른얼른 책망을 받아서 나의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들이 속속히 드러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드러나야만 고칠 수 있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드러나지 않으면 절대 스스로는 잘 깨달을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말씀을 다 깨닫고 통달하고, 자기의 영적 연약함이나 부족함들을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겪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말씀과 성영 안에서 자기를 살피고 돌아보는 것이지만,
많은 경우 책망을 통해 가르치시고 연단하신다는 것을 시간이 많이 지나고서야 제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책망은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만큼은 정말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임을 제가 깊이 체험을 했기에
이 유익을 함께 나누고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마음에서 글을 써서 올린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인본의 것에서 나오는 생각들을 늘 조심하고 경계하도록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신 구원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믿음 안에서 저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주시는 권면임을 알기에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6:23)

구원님의 댓글

구원 작성일

할레루야 아멘

은혜로님 오해라니요  절대 오해가 아님니다 은혜로님 예수님안에서 하나된것을 무엇보다 기쁨니다
은혜로님 글을 통해 많은 것을  은혜 받고 있읍니다.
저는 책망할 위치도 자격도 없읍니다.그렇게 생각 해주셨으면 감사합니다
모든것은 하나님의 공의로 보아야 한다고 봄니다
하나님의공의를 사람의 판단 기준으로 보면 오해가 있읍니다
예수님도 할례의 예를들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것을 말씀하셨읍니다.
외모로 판단 하지말고 공의로 판단하라 하신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본뜻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겉만 해석하므로 잘못보고 해석하므로
예수님을 보지 못한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성 회복이나 관계회복을 위해 오신분이 아니라는것을 잘아시리라 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관계도 그렇읍니다.
은혜로님이 마치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처럼 생각 하고 쓰신 것이라고는 생각 않읍니다.
그러나 글을 읽을때 마치 예수님과 베드로가 어떤 특별한 관계에서 인간적인 정이 풍기는 그런글을
올리신것같아 처음 답글에 올릴까하다. 절재하였는 데 이왕 댓글
올린김에 다 올릴라고 글을 올렸읍니다 절때 인간적인 모욕감을 주기위해서가 아님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 회복을 인간적인 감동으로 쓰셨 다는것입니다
성영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쓰셨읍니다 그내용은 인간적인 감동을 줄지는모르지만
말씀에 깊이가 없읍니다 다시말하면 생명을 줄수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공의를 잘아시리라 봅니다 아까 예수님이 하신말씀
다시말하면 유대인이 말씀을 겉만보고 해석하므로 예수님의 하신일을 보지못하는것
은혜로님 정말로 예수님안에 형제임을 사랑합니다
절때오해 하지 마시기 바람니다

모든영광 아버지와 아들 성영님 삼위 하나님께 돌림니다.

은혜로님의 댓글

은혜로 댓글의 댓글 작성일

구원님의 충고(책망) 감사합니다.

사실 요한21장의 이 부분은,
대체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회복시켜 주시는 것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저는 이 부분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해석하기 참 어려운 구절이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특히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는 질문부터가 해석하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원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로,
다시 말해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만큼은 버리지 않겠다고,
다른 제자들에 비해 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측면으로 베드로 자신이 그렇게 말을 했기 때문에
그것과 연관해서 예수님께서도 다른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그렇게 물으셨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로 번역을 해 놓으니
많은 사람들이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로 오해를 하게 되고
거기에 따른 많은 논쟁들이 오간다는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단어의 순서 하나만 바꾸어도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하튼,
요한21장의 이 부분의 말씀은 첫 시작부터가 해석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것,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만큼은 그랬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어찌 됐든
저의 글에서 요한21장의 해석에 대해 인본적인 해석이 보이고,
인간적인 감동으로만 여겨지셨다면
저의 해석은 과감히 무시하고 버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취할 것만 취하는 게 현명한 것이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히 충고(책망)해 주는 것은 더욱 지혜로운 것입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도하면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직 신본의 관점으로만 말씀을 대하고 해석하도록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등대님의 댓글

등대 작성일

할렐루야!
엘로힘 하나님께 찬양드리며,영광드립니다.
무엇이 부족하고,흠됨이 있겠습니까?
어찌하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이요,그리스도를 전파함이니,
아버지께서 어찌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간증의 글이 책망받을 수 없음이니, 곧 그분에게 주신 은혜와 감동을 적어
어찌하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기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책망은 성영께서 아직 내안에 간사함이 있을때,보여 주시고 책망하심으로 회개하게 하시고
더한것이 없도록 죄(....아시지요)를 범하지 말라.하십니다.
 간증의 글을 읽고 댓글을 읽으며,이 생명의 말씀의 역사하심을 보고 느끼며,
저 자신에게 또 물어 확신을 증거해 봅니다.
한가지 저에게 주시는 감동으로 쓰는것이니,각자 또한 깨달음을 주시는것으로
스스로 살피는 은혜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이 글들이 읽는 저에게 이곳 레마의 말씀으로 네게 생명이 되어있으면,
무엇이 부족함이 있어 무엇을 더 알고 싶으냐? 물으심에! 없습니다. 대답합니다.
그럼 네 삶에서 이 생명을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 네 목숨을 드리겠느냐? 물으심에
예 그럼요! 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나의 구세주요 하나님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전하고 증거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전하다 목숨을 잃더라도 어찌 감사치 않겠습니까!
그리 할 수만 있다면, 그리 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여 주시면,감사합니다. 아멘입니다.
이렇게 물으시고 대답함에 부족함이 없는것이 저의 삶입니다.
저는 죽고 오직 말씀만이 내게있어 살아계신 말씀(성영님)이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깨달았으면,그것을 실천하여 역사하심을 경험함이 있어야 증인이 될 수 있음을
성영님께서 알게 하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넘치기에 내 영이 감사로 넘치나이다. 고백 드립니다.

이 생명되시는 레마 말씀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기에 더 깊이 알고자 힘쓰지 말고, 행하라!!!
이것이 저에게 주시는 감동이기에 댓글을 남겨 봅니다.
각자 모든 분들께 주시는 은혜와 감동은 동일함이나,
또 다른것을 주심은 모두에게 덕이 되고 유익이 되게하시기 위함 인줄 압니다.
하지만 깨달은것을 소유하여 삶에 적용함으로 더 깊고 세밀한 부분을 보여주시고 행하게 하심을 경험합니다.

힘차게! 성영님의 인도하사 아버지 기뻐하시는 삶의 현장.
저에게 주시는 행전을 많이 증거 할 수 있도록 인도 하실 줄 믿고 감사드며,
우리의 생명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구원님의 댓글

구원 작성일

등대님의 글을 보니
총을 가졌는데 총알을 들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것과 같은 느낌이듬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 생각으로 두리뭉실하게 덮어 버린다면 또한 어리석음과 같읍니다.
이래도좋고 저래도 좋고 하나님 말씀을 자기생각대로 움직이는 결과가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영과 혼을 골수를 찔러 쪼개듯이 예리하다 했읍니다

행함이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깨닫지 못하신것 같읍니다
말씀이 등불이되어 한걸음 한걸음 가야 합니다
그렇치 않고는 내마음대로 가면 아직 어두움에 갈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나에게 있는것이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다는것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뜻은 사람에게 있는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다는것
잘 알으실리라 봅니다.

등대님의 댓글

등대 작성일

어찌 구원님과 같은 믿음의 단계에 이르렀겠습니까!
그래서 항상 더욱 구하고 찾고 두두리는 수고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행하신 일이 많아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 하셨는데,
그 깊고 높고 넓고 광대하신 것을 다 내것으로 소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이 미천한 자에게 주신 은혜만이라도 삶에 적용하며,
또 그 가운데서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다스리고자 하시는 그 뜻을 깨닫게 하시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간절함에 애통함이요,목말라 있음이,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고,목자 되시어
인도하심에 내 영이 충만함을 고백하기에 드린 글 이오니, 너그럽게 이해하시고 기도해 주세요.
더욱 말씀이 등불이 되어 한걸음 한걸음 인도하실 줄 믿고 감사드립니다.

할렐루야1님의 댓글

할렐루야1 작성일

책망..제목 그대로 책망 주시는 은혜의 시간 같네요 ^^

구원님께서 여러모양의 각도로 보시고 훈계를 하시니
깨달은 감동으로 말씀해 주시니 나름 공감도 해봅니다.

그러나
이미 다들 알고계시겠지만
누구에게나 성영말씀의 은혜와 감동은 성영안에서 동일하지만,
가고자하는 연단의시간과 각자의 위치에서 경험하고 알아가는
과정은 다 다를수 있다고 봅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향한 간절하고 똑같은 푯대를 향하여 가지만
그 과정속에서 느끼며 경험하며 육을 벗어야 하는 자신들에게 주는 성영께서
주시는 가르침의 깨닫는 돌이키는 위치는 다르겠지요..
그동안 육신의삶을 다 다르게 살았고  믿음의 시작도 과정도 각기 다르듯이..

그러나 말씀의 진리를 왜곡해서 듣고 가는것이
보일때는 당연지사 지적해줘야하고 고쳐줘야겠지요..
자신도 모르고 속는것이요 속이는 것이 되는것이니깐요..

그래서 간증을 올리고  댓글을 쓰시며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어찌보면 더욱더 자신을 비춰보고 이미 그 위치에서 벗어나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도
받아들여 자신을 돌아볼수 있는것이 되니 그 또한 은혜위에 은혜도 되겠지요.

이미 다 더욱 깨달은자의 위치에서 볼때는 다른  성도들의 말하는것이나
글을 쓴것을 볼때 누구나 그 사람의 어떤 과정이라는것을
볼수도 있고 알수도 있는것이 되니깐요. 그러니..알면 알수록 더욱 겸손하지않을수 밖에 없는것이 되겠고요..

모든것 이미 다알고 계셨던 예수님.
사람의 모든것을 꿰뚫고 계시는 예수님의
눈빛..베드로가 육의인간으로는  예수님을 부인할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바라보셨던 그 눈빛을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묵상해봅니다.

그러나 그 간절하고 예수님을 사모하는 베드로의 마음에
결국 성영께서 모든것을 이루어주셨듯이..

정말 온전한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믿음 갖기를 소원하는 지체들은 자매요 형제라 하셨으니 서로 격려하고 서로기도하며
축복하며 가는속에 성영충만으로 예수님을 맞을수 있는 신부가 될거라는 생각과
예수님을 닮은 겸손함을 더욱더욱 깨달아 능력이 되야함을 소원하며 묵상을 해봅니다.

할렐루야1님의 댓글

할렐루야1 작성일

비록
인간의마음으로
인간의양심으로
인간의생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했던 베드로도
그마음을 꿰뚫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거짓없는 인간양심이라도
성영아니면 무너지고 부인할수밖에 없는 믿음이란것.거짓이 될수밖에없다는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죄를 지을수밖에 없었던 애통해하는 베드로가 통회자복할수 있는마음 바탕이
있으니.. 비로서 결국
성영께서 오셔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수있는 반석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내가 베드로와 같은 예수님의 제자라면..
성영께서 주시는 믿음을 받아 가질수 있는조건
성영을 받을수 있는 조건에 맞춘 삶이였던가.
성영께서 임하셔서 온전히 성영을 따르는 믿음인가.
내가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릴수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
정말 내가 베드로처럼 베드로를 닮은 삶이였는가.
베드로처럼 모든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쫒았는가..

먼저 물두멍을 통해 다시한번 점검하며,성소안에서 제사장의삶으로서
등대와떡상으로서의 제사장의 삶이 되었는가.
예수님으로 사는 삶이 되어야만 베드로와 같은 예수님의 신부자격이 될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며 다시한번 돌아보며 확증하며
간증글을 올려주신 은혜로님과 구원님을 통해 깨닫게 해주신
베드로사건을 영혼으로 깨닫는 믿음에 도움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구원님의 댓글

구원 작성일

신목사님 말씀을 처음 들을때 나에게 돌이 날아와 박히는 무언가 알지는 모르지만
나의 마음속에 확신이 오는 것이었읍니다.
이제까지 저는 나의 의지적인 믿음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한것 같애요.
그런 가운데 외주하는 성령께서 간혹 말씀가운데 역사 하신것 같읍니다.
또 알기는 알았지만 확실히 깨닫지는 못한것 같읍니다.
그래서 말씀을 참 많이 읽은것 같읍니다.(나름대로 생각해서입니다.)
또 방향을 못잡고 누가 이렇게 말하면 이거같고 저렇게 말하면 저거같고
나름 사람을 예수님보다 크게 보여 사람(목사님)를 더 크게보여 예수님한테 잘보일려고
하는것이 아니라 사람한테 잘보이는것이 하나님한테 잘하는것이다.
하는것이 나의 신앙 생활 인것 같읍니다 또 나름 나의 마음은 항상 갈급함이 있엇읍니다
그래서 나름 세상보다 말씀을 상고 하고 말씀을 보았읍니다
그리고 나름 죽으면 천국 가는것이구나 하고 소위말하는 장례찬송 천국찬송을
무척 좋아했읍니다.

그러던중 목사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돌이하나 날아와 박히는 그런 느낌이었읍니다.
왠지 저희 마음속에 아! 내가 바라던 믿음과 소망이 일치하는 것을 알았읍니다.
아! 이거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밤낮 쉬지않고 들은것 같읍니다.
아! 내가 소망하던 예수님이 어렵고 힘든 하나님이 아니구나 아!내가 바라던 천국이
사실로 왔다는것이 꿈만 같았읍니다.
또 처음에 말씀듣고 세상으로 외면 당하는 것 같아  또 기존 교회 생활이 익숙한 저에게 무척 외로운 것 같았읍니다.
그래서 목사님 한테 전화를 많이 한것 같읍니다.
그때마다 목사님 자신이 내처지가 되어 잘 이해 해주신것 같읍니다
그리고 점점 세상은 멀어지지만 목사님말씀만듣고 또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셨읍니다.
지금도 너무도 부족한 저를 바라봄니다.
한시라도 예수님께 붙어있지 안으면 마음이 불안한 느낌이 옴니다.
또 그렇게 생각 합니다 다른사람은 예수님 부인하면 용서받을수 있을진 몰라도
저는 아니다 하고 생각합니다
저 나름대로 은사와 은혜를 너무 많이 받은것 같읍니다

그래서 나름 깨달은 말씀을 카톡에 보내고 문자도보내고 하였읍니다.
인터넷 할줄 모르지만 예수님의 홈피를 가입하고 또 가입할줄도 몰라 남들한테 물어보고
간신히 가입하여 또 들어갈줄 몰라서 또 다시 가입하고 하며 나름 글을 올렸읍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하는 목사님 말씀대로 원문 설교를 읽을때 또 나름 정리하고 요점을 알으면 나에게
더 빨리 알것이다 핵심이무엇인가 핵심을 알으면 전체를 아는것이다하는 생각이 들어
나름 정리하고 정리하여 내심령에 새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것은 남들한테 나타내고자 하는것이아니라 나한테 득이될까 하고 싶어서 올렸읍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경이 다 예수님으로 역사 하셨다는 것이 눈에 다 보이듯이 보였읍니다
특히 다윗이 한 행동과 시편에 다윗을 통해 예수님이 하신 것이라는것이 눈에 보이듯이 보였읍니다.
목사님을 보내주신 아버지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름니다.
그래서 종종 글을 못쓰지만 감사의 내용을 댓글 올린것 같읍니다.
또 아버지 하나님이 왜 목사님을 보내주셨나 하는것까지 알게 하셨읍니다.

그것은 말로 글로 표현 못하지만 저희 마음으로 확실히 확신시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목사니 뭐니 하는 별소리, 별 판단 다하지만 저는 그걸 다 무시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에게 확신 시켜주셨는데 무엇을 내가 더 생각 합니까?

제가 여기 간증글이 올려오는 것을 보면 항상 저에게 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인간적으로 자제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지만 또 순간적으로 답까지 주시면서
올리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여 올림니다

그러니 저도 너무나 부족합니다.
또 제가 답글이나 댓글을 올릴때 합당치 않으면 저는 욕하시고 말씀에 합당하면 은혜받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당부하고 싶은 것은 절때로 다른 말씀 절때 듣지마세요
이말씀듣다가 막히면 기다리세요 그리고 사모하세요 다른데 기웃거리지마세요
왜 이말씀을 들어야 하는가를 아시는분은 아시리라 봄니다
지혜가 있으신분은 아실이라봄니다.

할렐루야1님의 댓글

할렐루야1 작성일

아멘.

다른 말씀이 귀하든 은혜롭든 말든 가짜든 진짜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 목사님말씀이 성영께서 주신말씀이라고 스스로 인정했다면
비록 연단의시간이 고되고 힘들고 길더라도 인내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40년 광야생활에 38년 말기에 죽임을 당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교훈삼아
어리석은 죄를 범하여 멸망하지 말고 정신바짝 차려야할듯 합니다

다른데 기웃거리다가  순식간에 어둠이 덮치는것도 모르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곧 귀신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속지요..
스스로 믿음을 변호하고 있는줄도 모르지요..
인간의신심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착각에 빠져 있는줄 모르고 깨달은자처럼 속지요..
위험에 처해 있는줄도 모르고 스스로 양심에 혼자만의 위로에서 헤어날줄 모릅니다.

그 누구도 붙잡아 줄수없는 믿음을 정말 근신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듯 합니다.

내구주예수님의 댓글

내구주예수 작성일

구원님의 답글 내용 중에서 '내사랑을 입은 자만이 나를 사랑할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눈물이 참 많이 났습니다.

요며칠 성영님께서 형편없는, 부끄러운 내 모습을 보여주시며 내 안에 아직도 살아있는 나를 보여주셨습니다.
어찌 그리 부끄러운지, 잘못한 아이가 엄마를 피하듯 말씀을 들을, 기도할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글을 읽고 아, 이거였구나.
성영님은 제가 스스로 한발 한발 내딛을 수 있도록, 하나하나 씻을수 있도록 보여주시고, 보듬어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저보다 더 저를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모든걸 이루시고, 이제 온전히 제게 임하시기 위해
제 안에 사단으로부터 나왔던 모든 더러운 것을 치워주십니다.
제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하나된 성도님들의 간증글과 답글로 제 자신의 믿음을 근신하며 기도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이메일 : sarah161@hanmail.net
Copyright© 2015 예수님의 교회. All rights reserved.

에이아이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