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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을 돌립니다

성영님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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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은혜로 작성일13-02-06 03:11 조회8,28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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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렵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넘치는 기쁨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아픔과 탄식이 뒤섞여 있기에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들을 들으면서 갖게 된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 사건에 대한 영적 혼란과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간 제 나름의 많은 노력과 분투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창세기 시리즈 말씀들을 처음부터 다시 듣기 시작했고, 몇몇 설교들은 여러 번 듣기를 반복했으며, 말씀을 차근차근 읽는 가운데 생각하고 생각하며 또 생각하고.... 기도하며 성영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혼란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이성이 갖는 한계를 철저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나들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6시간 동안 창세기 설교 말씀들을 다시 반복해서 들으며 혹시 제가 놓친 부분은 없는지 살피며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몇몇 사람의 설교도 들어보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는 그야말로 압권 그 자체였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논리정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지, 듣는 이의 믿음과 헌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 설교를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을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난 후 저의 입술에서는, 너무 은혜 받았어요. 마음이 뜨거워지고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하는 그런 말이 아니라, 당신의 설교는 소위 말하는 은혜의 도가니 그 자체였지만, 거짓이요!! 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의 설교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의 설교가 가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도, 선악과 사건은 인간의 실패요, 나아가 하나님의 실패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창세기 시리즈 말씀들을 들으면서 제 자신 영적 혼란과 의문들을 갖기는 했지만, 목사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제 영은 알고 있었고, 믿음으로 동의하게 됐습니다. 다만, 그 믿음이 더욱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이기를 바랐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제 자신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와 인격이 따로 따로 반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온전한 믿음이란 덮어놓고 믿는다거나, 마음이 뜨거워진다거나 어떤 대단한 체험을 했기 때문에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이성적이며, 또한 대단히 감정적, 체험적이고, 한편으로는 자발적이며, 인격과 의지가 말씀에 온전히 굴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온전한 믿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기에,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이성적으로는 다소 혼란스럽고 정리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성영님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온전히 말씀을 깨닫기 위해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반복해서 들어왔던 것이지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저는 제가 가졌던 영적 혼란과 의문들에 대해서 이상하리만치 자유하고, 내가 언제 그런 혼란을 겪기라도 했던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반복해서 듣는 가운데, ‘하와가 그 나무를 본즉....먹었더라는 구절이 자연스럽게 제 마음 가운데 들어옴을 느꼈습니다. 그 말씀 바로 앞의 구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이 구절은 어쩌면 하와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단 자신의 교만과 악을 스스로 밝히 드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 가운데 예수님이 들려 주셨던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이제 죄와 사망의 지배 가운데 놓인 아담과 하와이며,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마저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인 그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숨을 수밖에 없었던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 그 두 사람이며,
이제 그 아들은 그대로 계속해서 비참한 삶을 살 것인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였는데, 이는 또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며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와 같으며,
짐승만도 못한 자신의 처지와는 반대로 떠나온 아버지의 집은 얼마나 풍성하고 온전한 곳이었는지, 그리워하는 아들의 마음은 벗었으므로 부끄러워 숨었으나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했던 아담의 마음과 같은 것이며,
이제 그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다시 돌아가기에는 자신이 얼마나 패역무도한 죄인지 깨닫는 아들의 마음은 또한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있게 한 여자가 주므로(다스리지 못하므로) 먹었나이다하며 고백하는 아담의 자백과 같은 것이며,
돌아온 아들을 위해 살진 짐승을 잡아 잔치를 벌이며 좋은 옷과 손가락지를 주도록 한 아버지의 마음은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위해 친히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지어 입힌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것이며....
  
저는, 집을 떠난 탕자의 이야기는 신약판 선악과 사건이며, 선악과 사건은 구약판 탕자의 이야기와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다시 들으면서 탕자의 비유를 곰곰이 생각하게 됐고, 집을 떠나 짐승만도 못한 비참한 처지에 놓인 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자존심이었습니다. 자존심은 그 마음과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인데, 만일 집을 떠난 아들이 끝까지 자기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고집했다면 그는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 그것만이 집을 떠나 짐승만도 못한 처지에 놓인 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 앞에 놓인 짐승만도 못한 비참한 처지와, 부끄러워 숨을 수밖에 없는 아담의 벌거벗은 처지는, 인간이 자기 실체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허락된 죄임을 생각할 때에, 선악과 사건은 창세 전부터 갖고 계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이요 지혜였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집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 곁을 지킨 큰아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큰아들은 결코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자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율법(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을 지킨 자였지만, 아버지를 사랑하지는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용납할 수 없었기(...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때문입니다. 그는 종일 수고하며 아버지의 땅을 일구지만, 아버지를 사랑한다기보다는 큰아들이라는 의무감에서, 혹은 아버지의 재산을 당연히 상속 받을 것이라는 계산된 마음으로 했음이 분명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 되며 아들 됨이란, 무언가를 행한 후에 얻기를 바라는 보상의 메카니즘으로 얽힌 관계(...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지시하고 복종하는 상하의 관계(...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이 어김이 없거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집을 나간 동생은 피를 나누고 사랑을 나눌 형제가 아니라 정죄와 판단의 대상(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일 뿐이며, 결단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너무나 무능력하고 무책임할 정도로 둘째 아들의 방탕을 허락(방조)한 아버지와 따먹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인간의 본능 앞에 선악과를 놓아둔 하나님을, 인간이 과연 판단하거나 이러쿵저러쿵 조언할 수 있는가? 저는 그 질문에 집을 나가지 않고 아버지 곁을 지킨 큰아들을 보면서,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의 방탕을 묵인하면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금단의 열매를 인간의 본능과 욕망의 거리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곳에 놓아둔 하나님의 속마음은 어떤 것인지, 많은 생각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순종하고 사랑하지만 그 마음에 불만과 미움과 판단과 정죄가 가득한 큰아들, 그는 어쩌면 결코 금단의 열매를 따먹지 않았고 또 영원히 따먹지도 않을 테지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란다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결단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을 알 수 없는 관계, 마음을 주지 않음으로 마음을 헤아릴 수 없고, 마음을 받을 수도 없는 관계, 마음을 주고받지 못하므로 결코 사랑할 수 없는 관계, 상하복종의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관계, 큰아들. 집을 나가지도 않고, 선악과도 따먹지 않은 아들, 잘난 아들 큰아들.
  
  
목사님의 창세기 시리즈 설교 말씀들을 들으면서 갖게 된 선악과 사건에 대한 의문과 혼란 속에서 제 나름 영적 이해와 질서를 얻고자 무던히도 힘쓴 나날들을 보냈지만, 어쩌면 이런 과정들을 통해 복음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구속의 경륜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는 아니었나 생각도 해봅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대단한 깨달음이나 이해를 갖게 된 것은 아니지만, 저는 일련의 고통(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내 자신 스스로 내 이성에 사망 선고를 내렸습니다!!!)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저는 제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수수께끼 같이 느껴집니다. 나는 왜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아니고 사람인지, 나라는 존재는 캄캄한 밤하늘의 어두움이 아니고 빛의 자녀인지, 나는 왜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인지, 나는 어떻게 하다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 하나님은 어쩌다가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는지,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우주의 먼지와도 같은 존재에게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줘야 했는지, 과연 내가 존재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요 기쁨이 되는 것인지, 나 한 사람 없다 한들 하나님의 영광은 훼손되지 않고 내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영원 영원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거룩한 당신께서 십자가 저주의 형벌을 받으셔야 했는지.....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인지는 여전히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나를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형벌 받으시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나를 사랑하신 것. 피 흘려 죽기 위해 나와 같은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예수께서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심은 사람으로서 죽으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 완전한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예수께서 붉은 피를 흘리며 죽으심은 사람이 피 흘려 죽은 것이기에 속죄가 되며(17:11) 또한 예수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죽으심의 효력은 영원하다는 것. 영원하신 성영을 통한 하나님의 피 흘리심이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영원한 효력이 된다는 것. 예수의 피 흘려 죽으심은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는 자들을 속죄하기 위한 것이자 또한 시간을 뛰어 넘고 공간을 초월해 믿음으로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한 사람(5;12~21)이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 벗었으므로 부끄러워 숨은 자가 바로 나라는 것, 그런 내게 오셔서 친히 짐승을 잡아(피 흘려) 가죽 옷을 지어 입힌 분을 내가 안다는 것,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
그 예수를 내가 알고, 그 예수께서 나를 알므로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하늘 본향을 향해 가는 길이라는 것.
  
    
목사님께서 오열하며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함께 울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아픔과 가슴 저미는 사랑을 생각하니 너무나 죄송하고 마음 아파 저 또한 가슴을 치며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시대, 교회는 죽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주의 종들이 거짓 가르침과 거짓 복음으로 사람들을 미혹해 함께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자칭 주의 종을 자처하는 자들과 그들을 맹신하며 맹종하는 자들의 합작품이 바로 이 시대 교회이며 거짓 복음이며 배교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맹종과 맹신의 삶에서 제자리걸음하는 연약한 자였지만, 목사님을 만나 성영의 조명 가운데 전하시는 말씀을 통해 조금씩 분별해 가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목사님, 저는 참 마음이 아픕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프고, 너무나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알지 못한 것이 아픕니다. 대형 교회, 유명한 목사들이 WCC를 앞세워 평화와 일치와 사랑을 외치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를 알지 못하고 믿지도 않습니다. 만일 그들이 사람이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으심을 통해서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깨닫고 믿었다면 결코 그런 망령된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십자가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예배가 너무나 싫습니다. 예배 때마다 강단에서는 피 비린내가 진동해야 하고, 설교 때마다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날것의 피 복음이 외쳐져야 하지만, 웬일인지 예수님은 너무나 고상하고 위대하신 현자로 박제되어 교회라는 박물관의 전시장 속에 고이 모셔져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 주 예수님 다시 오실 날이 지척인데,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정죄하며 이단시하고, 종말론자로 치부하고,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정죄 당하고 이단으로 몰릴지언정, 평안하다 안전하다 말하며 깊이 잠들어 있는 저 수많은 백성들은 어찌 해야 하는지, 어찌하면 그들을 깨울 수 있을지, 저 수많은 삯군 목자들은 그 죄를 어찌 감당하려고 저리도 당당한 것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원통해서, 날마다 내 가슴만 때려 치며 울고 울며 또 웁니다.
  
목사님, 저는 우리 아이들이 나이가 먹고 자라가는 것이 기쁘면서도 두렵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우리 아이들의 그 기다림이 저는 싫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세상에 물들고 거짓 복음에 속기 전에 우리 주 예수님 오셔서 저 아이들만이라도 데려 가셨으면 하는 마음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믿음과 말씀으로 끝까지 양육하지 못할까 근심하는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예수님 나팔 불면 구름 타고 하늘나라 갈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우리 아이들의 깨끗한 믿음이 변질될까 저는 두렵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욱 그분을 사랑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그 사실이 한없이 기쁘고 즐거우면서도, 교회를 생각하고 헛되이 믿는 자들을 생각하고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또 한편으로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지고 두렵고 슬픕니다.
  
, 하나님 아버지, 이 약한 자를 붙들어 주시고, 이 시대 교회를 붙들어 주시고,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을 지켜 주시며, 참된 주의 말씀을 전하는 당신의 종 신성엽 목사님을 붙들어 주옵소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때가 저녁을 지나 아침이 되었습니다. 주님, 다시 일터에 나가 일해야 하는 제게 힘을 주시고 지혜 주시고 크신 은혜로 붙들어 주옵소서.

댓글목록

yis님의 댓글

yis 작성일

은혜로님 반갑습니다.
님의 글을보는 순간 예수님의사랑  이웃,사랑하시는 그~뜨거운 열정이 저에게도 느껴져 오네요.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때가 저녁을 지나 아침이 되었습니다.)
어찌...저녁에 시작하여 아침까지 그리고 일터로 나가신다 하시니 정말 대단 하십니다.
그리고 님의 논리,정연하게 쓰여지는 긴~글들 읽으면서 저의 짧은 지식으로 답글을 달고자 하나 엄두가 나질 않아는데
오늘은 부족 하나마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짧은 답글을 써 봅니다.
오직주의은혜로님 말씀으로 은헤 받으시고 감사하여 올려주시는 간증글 저도 감사하며 잘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서 복된자가 되어 예수님의교회 홈피에서 만날수 있게되어 감사 합니다.


이메일 : sarah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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