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유익은 보혜사 성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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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은혜로 작성일18-08-26 03:49 조회6,436회 댓글5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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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한 달을 목사님의 『요한복음』 말씀을 읽으며 보냈습니다.
유난히도 덥고, 더운 정도가 아니라 포악하기까지 했던 무더위를 목사님의 말씀을 읽으며 이겨냈습니다.
처음 계획은 며칠간의 여름휴가 동안 『요한복음』을 1회독 하는 것이었는데, 읽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고, 마치기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책 한 권 읽는데 무슨 한 달이나 걸려? 그렇게 어렵고 두꺼운 책인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시간적인 여유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핑계라면 핑계일 수도 있고, 소설책 보듯이 대충 눈으로 훑어볼 책이 아니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한때는 글자라고 생긴 건 모조리 다 읽어대고, 신문을 뒤에서부터 시작해 1면까지 꼼꼼히 살피며 읽는 것이 취미이기도 했고, 어지간한 읽을거리는 빠지지 않고 보았던 활자 중독증 환자였지만, 그래서 책을 보는 데에는 보통의 사람들에 비해 뒤질 정도는 아니라는 허접한 자부심도 갖고 있었지만,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읽는 데에는 그 어떤 독서 노하우나 속독(速讀)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꼼꼼히 살피며 읽어야 할 책이 신성엽 목사님의 가르쳐 전하신 말씀입니다.
빨리 읽고 반복해서 회독 수를 높이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도 해 보았지만, 그렇게 읽다 보니 하나도 유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고, 처음부터 돌아가 다시 읽어야 했습니다.
성경을 보는 것보다 더 세밀하게 살펴야 했고, 온 마음과 신경을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어느 틈엔가 잡념이 타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아차! 싶으면 어김없었습니다.
한두 번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단어 뜻, 문장 뜻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하늘의 것, 신영한 영적인 것을 다룬 레마의 내용이기에 머리로 이해된다고 해서 이해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땐 성영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마음속으로 깊이 묵상하며 읽고 또 읽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성영님을 의지해 반복하여 읽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내용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간 듣기도 하고 읽기도 하며 수없이 접한 내용이었지만, 어쩜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여러 번 듣고 읽다 보니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착각해 그냥 지나쳤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도 듣고 읽다 보니, 너무 익숙한 말씀 익숙한 내용이다 보니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믿음의 능력은 갖추지 못하니 알아도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 은혜, 진리, 그 관계와 자유>를 읽는데, 한편으로는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다시 기억을 정리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듣기도 여러 번 했고 특별히 어려운 내용은 없다는 생각에 읽을 순서(목차)에 따라 그냥 읽고 가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인가, 아버지 앞에서 죄를 짓는 제 자신을 보면서 아버지께 부끄럽고 죄스럽고, 애통함으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며, 용서해 주심에 대한 확신 가운데 감사를 드렸지만, <율법, 은혜, 진리, 그 관계와 자유>를 다시 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펴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읽는데 어느 부분에 이르러 ‘쾅’ 하며 제 머리가 부서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4쇄)으로 101페이지 하단 부분부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다 죄를 못 박아 버리고 다시 살아나셨으니, 다시 말하면 죄가, 율법이,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십자가로 몰아서 지옥의 형벌에 넘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기에 죽을 수가 없으니 그 지옥의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안에 성영님으로 와 계시면 자기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산 것이요, 예수님의 영생하는 생명을 얻은 것이기에 이제 죄가 주장할 수 없고 율법의 심판은 끝났습니다. 그래서 의의 종이지, 율법의 종, 죄의 종이 아닙니다. 물론, 잘못하는 것들을 통해서 영적으로 자꾸 상처를 입거나 자기 생활과 육체에 계속 어려움을 겪는 일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더는 죄에 눌리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으로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당당히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모든 죄에서 자유케 된 이 진리를 알고 자유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사람이 만일에 어쩌다 실수로 죄지은 것 때문에 마음속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거나 그 죄 때문에 자꾸 마음에 걸려서 예수님 믿는 것이 껄끄럽고 예배드리러 나오는 것이 편치 않다면 이것은 죄에서 자유 얻은 것도 아니요, 믿음에서 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못 박히실 때 죄를 못 박은 것이요,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믿는 나도 같이 못 박혀 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가진 너는 이제 죄에서 자유하다, 너는 의의 종이다, 이제 더는 죄에 종노릇하지 마라 하셨는데 어쩌다가 실수하여 지은 죄로 마음에 그렇게 죄의식을 안고 있다면 이것은 지금 율법 쪽에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까, 진리 쪽에 있다는 것입니까? 율법 쪽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지었을지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이 율법의 정죄 쪽입니까, 예수님의 은혜 쪽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생명을 내놓으시면서 우리에게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셨는데, 그 은혜의 크기가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깨끗게 하신 은혜인데, 이 은혜의 크기를 모른다면 그리고 믿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지금 잘못 믿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크기를 알고 은혜 쪽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로 자유하게 되는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어요. 잘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저를 용서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붙잡아야 하는 그것이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요, 의의 종이요, 믿음입니다.
그리고 자유의 믿음으로 성영님과 함께 말씀을 깨닫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그 믿음의 열심을 행하고 나가면 점차 자기의 죄성도 힘을 잃게 되어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죄짓는데 어떻게?……하나님께 양심이 있지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그러니까 자기 양심으로 하지 말라고, 자기 양심으로 하나님 만나는 것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양심은 육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는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악한 영이 자꾸 그 양심에다 참소하기 때문에 죄의식(죄책감)을 갖는 겁니다. ‘너 죄지었으면서 양심이 있지 어떻게 죄짓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느냐? 죄지으면 하나님께 벌 받는다고 했으니 너 벌 받지 않겠냐? 하고 참소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사람들이 여기에 붙들려서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평안이 없습니다. 안식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자기 양심으로 하나님을 대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중략…)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은혜를 입었으면 이제 자기를 보지 말고, 자기 양심의 소리 듣지 말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은혜를 붙들라는 말입니다. 이미,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아 버린 율법보다 큰 그 은혜를 붙들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것이 생명 얻게 하는 참법입니다. 죄는 범하면 그것이 죄인 줄은 알면서도 진리를 믿지 못하고 어기는 것은 죄인 줄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왜 죄짓는 것은 죄인 줄 알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것은 더 큰 죄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래서 이제는 죄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 간다고 말씀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언젠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시며 백지와 흑지를 두고 둘 중 어떤 것을 취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롬8:1~2 말씀이 떠오르면서 백지를 택하게 되었고, 용서의 기쁨으로 온 집 안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기뻐했다는 어느 설교 말씀이 떠올랐고, 저 역시도 동일한 기쁨과 충격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율법, 은혜, 진리, 그 관계와 자유>의 말씀을 그간 여러 번 듣기도 하고 읽기도 했지만, 머리로만 알았지 다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 실제로는 온전한 능력이 되지 못했음이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에도 온전히 선 믿음이 되지 못하니, 성영님께서 보다 못해 그걸 지적하시고 온전한 능력으로 세우시고자 <율법, 은혜, 진리, 그 관계와 자유>의 말씀을 다시 보게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영님, 저는 참 미련하고 부족한 자입니다. 그걸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율법, 은혜, 진리, 그 관계와 자유를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아버지 앞에서 또 죄를 짓고 말았지만, 죄가 더한 곳에 더욱 큰 은혜를 더하셔서 진리를 알게 하시고 진리를 붙잡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앞에서 죄짓고 넘어진 것이 도리어 감사했습니다.
넘어지지 않았다면, <율법, 은혜, 진리, 그 관계와 자유>를 다시 보지 않았을 것이고, 다시 보지 않았다면 어쩌면 진리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경험하지 못한 지식, 경험하여 내 것이 되지 못한 채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참으로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은 <거듭나면 나타나는 흔적들>과 <당신의 예배는 신영과 진정인가?>의 말씀을 수요일(광복절)에 읽었는데, 금요일 아침에 제 마음 가운데 그 말씀들을 다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또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돌아가 그 부분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는데, 저도 모르게 ‘어머머. 내가 뭘 읽은 거지? 아니, 이걸 왜 그냥 지나쳤지?’ 하며 부끄럽고 죄송한 생각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성영님께서 ‘그것 봐라. 너 그거 대충 읽었잖니?’ 하시며 꼼꼼히 보고 새김질해 내 것으로 간직해야함을 지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예배는 신영과 진정인가?>의 말씀 중 271페이지 첫 줄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거듭난 영’이라는 것은 우리 영에 오신, 우리 영과 하나 된 성영님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오신 성영님(생명)으로 예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대충 지나쳤던 것을 다시 보게 하시고, 이후에 목사님께서 홈페이지에 <하나님을 성부 성자라 하지 말라 하신 부연 말씀>의 글을 올리셨을 때 ‘사람 안에 들어오셨을 때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영이 되어 주셨으므로 그래서 성영이라고 한다는 것’과 연결하여 생각하게 하시고, 하나님께는 ‘성인 성(聖)’이나 ‘성스러울 성(聖)’ 같은 ‘성(聖)’을 붙일 수 없는 것이지만, 본래 영이신 성영님께서는 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사람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시기에 ‘성영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 김경미라는 존재가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인지, 성영님께서 세세히 간섭하여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절실히 깨닫고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머리가 좋아 깨달은 것도 아니고 성영님이 가르쳐 주셔서 알게 된 것이니 잘난 척하거나 으스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성영님이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장 같은 존재가 바로 저라는 사실을 절감했기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내 머리 굴릴 게 아니라 겸손히 성영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경험하여 아는 것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이 직역성경이 어떻고 헬라어 히브리어가 어떻고 하는 의견을 댓글로 올리셨지만, 그에 대해 할 말이 참으로 많지만, 성경 말씀은 하늘의 것, 신영한 영적인 것을 다룬 것이기에 오직 성영님으로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이 기회를 통해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만나 듣고, 책으로 보아 온 세월이 짧지 않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정식으로 출판되어 나오기 전, 창세기와 성전 요한복음의 말씀을 별도의 책으로 만드는 일에도 참여하기도 했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있었음에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깨달아 아는 것은 제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뿐입니다.
뭘 좀 아는 것 같으면 얼마 못 되어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고 있었다는 것을 제 스스로 목도하게 하십니다.
목사님께나 남들한테는 말도 못 하고 저 혼자 아버지께 부끄러워 눈물만 뚝뚝 흘립니다.
내가 좀 세워졌나? 싶으면, 또 얼마 못 되어 형편없는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꼭 내 자신의 경우가 아니어도,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다른 사람의 모습을 통해 제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는 너는 잘 하니? 남 판단할 것 없다. 너 자신이나 돌아보고 똑바로 가면 된다.’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만나 가르침 받으며 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요 은혜인지, 이 세상 그 어떤 언어나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죄 가운데 그대로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질 김경미를 살리시려고,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님 보내 주셨고, 예수님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셨고, 성영님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것을 가지고 오셨지만, 얼마나 듣는 귀가 없고 보는 눈이 없는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니 신성엽 목사님을 통해 생명의 말씀을 보내심으로 먹이시고 입히시고,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신성엽 목사님을 통해 보내신 레마의 말씀 만나지 못했다면, 김경미라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의 갈함과 빈곤으로 죽게 된, 죄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던 자, 그 누구를 통해서도 생명 얻지 못했지만, 오직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제 영이 생명을 얻었고, 그 어떤 것에도 뜻을 두지 못했던 삶이 오직 예수님으로 살고자 방향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자기 머리로 예수님 믿는다고 하며 잘난 척 설쳐댔는지 모릅니다.
보통 사람, 범인에 불과한 저라는 사람이 그러했을진대, 주의 종이라며 말씀 전한다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인본으로 믿었고, 자기 머리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인 것을, 레마의 말씀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자기 머리로 말씀 해석하고, 세상 지식으로 성경을 난도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게 죄인 줄도 몰랐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뜻에 합한 것인 줄로 알아 열심히 거짓 것들을 취하기 바빴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버지의 크신 은혜와 긍휼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저는 목에 깁스를 한 채 영영 인본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퇴로 없는 낭떠러지 끝에 위태하게 서 있는 느낌입니다.
안다는 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안다고 하면서도 알지 못하니, 허망한 것입니다.
안다고 하면서도 머리로만 알고, 경험하여 아는 것이 되지 못하니 허망한 것입니다.
머리로는 알고 지식도 넘치건만, 아는 만큼 경험하여 내 것, 내 능력이 되지 못하니 허망한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까놓고 보니 쭉정이입니다.
겉보기에는 알곡 같은데, 속사람은 텅 빈 쭉정이입니다.
말씀의 빛에 자세히 비추어 보니, 쭉정이 같은 자기가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그저 남들보다 빨리 간다고 해서 빨리 가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대충 듣고 대충 보는 것으로는 내 것이 되지 못하고, 속사람의 능력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습니다.
뭐, 그런 거야 진즉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아는 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성영님의 눈으로 보니, 입이 있어도 할 말 없는 존재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의 믿음을 도우시고 아버지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어 하늘 아버지 나라로 들이시기 위해 오신, 유익이신 보혜사 성영님을 사랑합니다.
의지하고 순종하기 원합니다.
댓글목록
김지혜성도님의 댓글
김지혜성도 작성일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올려 드립니다.
김윤성님의 댓글
김윤성 작성일아멘!
지민님의 댓글
지민 작성일아멘!
전선경님의 댓글
전선경 작성일아멘입니다
참믿음님의 댓글
참믿음 작성일저도 아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