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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삯은 사망이요"....(선악과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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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은혜로 작성일13-08-29 18:22 조회10,972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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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느 카페에 ‘율법’과 ‘하나님의 의’에 관한 내용을 선악과 사건에 빗대어 설명하는 글을 올렸다가 그 카페의 카페지기와 운영자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운영자 중 한 분이 목사님이신데, 그분께서 제게 하나님을 아주 악한 분으로 만드는 이단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날엔가 카페에 글을 올릴 수 없는 준회원으로 강등까지 시켰습니다(그 전에는 우수 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카페지기에게 그간의 제가 올린 글을 첨부해 장문의 메일을 보내면서, 제 스스로 그 카페를 탈퇴하게 됐습니다. 
오랫동안 그 카페 회원으로 활동해 왔고, 카페지기로부터 글을 자주 올려 주라는 요청까지 받을 정도로 우수 회원이었는데, 고민 끝에 카페를 탈퇴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간 그 카페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해 온 것은 그 카페가 청교도적 신앙과 언약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비교적 건전한 카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고(제가 아주 오랫동안 보수적인 장로교(합동)의 교인이었지요.), 마틴 로이드 존스를 비롯한 존 맥아더, 마이클 호튼 등의 신학을 좋아했던 저로서는 그 카페의 기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 때니 짐승의 표니 하면서 시대적 이슈에 휘둘리는 여타의 카페와는 달리 상당히 중립적이고 건전한 신앙 노선을 따르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입 초창기에는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을 했고, 카페 회원들은 물론 운영진으로부터도 글을 자주 올려 주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로 환영 받는 우수 회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성엽 목사님을 만나게 되고, 그 후 제가 영적으로 조금씩 분별력이 생기면서 그 카페 역시 인본주의와 전통이라는 누룩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운영진 중 한 명이 유학파 출신 목회자인데,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번역이 됐고, 오스왈드 챔버스에 관한 블러그며 페이스북까지 개설해 운영할 정도로 그 목사님은 오스왈드 챔버스를 추종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제가, “목사님은 오스왈드 챔버스를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보다 오스왈드 챔버스를 더 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는 질문을 던졌는데, 그 목사님께서는 “오스왈드 챔버스가 예수님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는 답을 해올 정도로 오스왈드 챔버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즉시 카페를 탈퇴하지는 않고, 글을 올리지는 않는 대신 단지 게시물을 참고로 읽는 정도로만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그 카페의 어느 회원(평소 제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회원입니다)이 율법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그의 글에 제가 선악과 사건에 빗대어 율법을 설명하는 댓글을 달았고, 또 그 회원이 저에게 반박 형식의 답글을 올리면서 판이 커지게 됐습니다.
평소에도 선악과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본주의적 시각에 갇혀 있는 것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껴왔던 저는 그 회원마저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상당히 조심스러우면서도,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예 작심을 하고 선악과와 관련한 제 의견의 글을 올리게 됐습니다.
그랬는데, 역시나 결과는 ‘너의 주장과 사상은 이단이다’였고, 저에게 공개적으로 회개하라는 촉구와 함께 카페 회원들에게는 저를 조심하라는 경고성 글까지 떴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하나님을 악한 존재로 만들 수밖에 없는 사단적이고 이단적인 저의 사상이 카페 안에 누룩처럼 번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그들은 서둘러 저를 이단 운운하며 공개적인 회개까지 촉구했고, 회원 등급을 준회원으로 강등을 시켰습니다.
그에 질세라 저 역시 운영자 목사님께 누구의 사상이나 주장이며, 배운 지식이나 전통적 해석에 붙잡혀 있지 말고 오직 성령의 조명하심 가운데 말씀을 보시라고, 충고성 댓글까지 달게 됐습니다.  
만일 저의 사상이 이단적인 것이라면,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 설명의 글이라도 올라오기를 내심 바랐지만, 그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저의 주장은 생각해 보고 말 것도 없이 무조건 ‘이단’이요 하나님을 악한 분으로 만드는 사단적인 해석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제 마음이 왠지 불편해지면서 영적으로 굉장히 다운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지?"
저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됐고, 아무래도 그 카페와의 공방이 발단이 된 듯했습니다.
특히 운영자 목사님이 아닌 카페지기에는 제가 애정을 갖고 나름 심혈을 기울여 메일까지 보내고, 그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며 그의 입장에서 질문을 던지며 답을 하곤 했는데, 사단은 이것을 그냥 두고만 있지 않고 저를 공격할 빌미로 삼은 것 같았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질문을 던진 것이 도리어 부메랑처럼 저를 공격해 온 것입니다. 

“만일 ‘정녕 죽으리라’를 받아들여야만 예수님이 오실 길이 마련되었다면,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면, 그렇다면 왜 그것이 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답변을 제시해 줘야 할 의무가 제게 주어졌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는 오랜 장고에 돌입하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사건 직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며 아담을 부르셨지만, 그것은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깨어진 영적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지, 결코 그에게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았고 단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신 목사님께서도 늘 강조한 것이었고, 죄에 대한 언급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 생각을 품자 하나님께서 이를 경고하면서부터입니다. 
제발 신 목사님의 말씀 영상을 좀 보라고 해도 아예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제가 쓴 글을 ‘이단’이라는 딱지까지 붙여 놓고 다른 사람들도 보지 못하게 하니, 답답하고 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이 선악과 사건을 통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사망(죽음)에 들어갔기에(롬5:12), 죄에 대한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답을 제시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주말과 주일 내내 성경의 여러 부분들을 찾아 상고하며 성령께서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시도록 간구하게 됐습니다.
성경을 찾아 연구하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하면 구할수록 저는 심한 영적 고통과 갈등으로 힘들어했고, 절벽에 선 듯한 두렵고 불안한 심정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다가 주일 새벽이 되어 제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평안이 찾아왔고, 계속해서 성령을 의지할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일이 지나가고.... 주일 저녁을 거쳐.... 다시 월요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선악과 사건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시작한 기도였지만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대로 순종해 가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과 함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같은 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고백을 끝으로 기도를 마치게 됐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아침을 준비하고, 식사를 하고, 아이들을 챙겨주고, 출근을 위해 옷을 입고 거울을 보는데 문득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하는 말씀이 뇌리에 박히듯 섬광처럼 떠올랐습니다.
“어? 뭐지?”
순간 저는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갑자기 그 말씀이 생각이 난 것인지, 거의 본능적으로 빛의 속도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거의 동시에 히브리서 2장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히2:14-15, KJV흠정역)


이 두 말씀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지만, 저는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고, 도대체 이 말씀들이 서로 무슨 연관이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들이 떠올랐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의 가닥들을 한 올 한 올 정리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전능한 분이시다.
전능하시기에 마귀, 곧 죽음(사망)의 권능을 가진 자를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단번에 멸하실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왜?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그분의 공의가 그것을 허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분의 공의는, 결과는 물론 과정 자체도 편벽됨이 없어야 하고 완전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 다시 말해 죽음을 이기기 위해 죽음을 택하셨다.
인류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쓴 죄인으로, 죄로 인해 죽었으나, 죄가 없는 분이셨기에 사망의 권능을 가진 자가 예수님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 마귀의 권능을 깨뜨리셨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수 있기 위해서는 죽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죽지 않으면 생명은 없다.
죽지 않으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오실 수 없다.
죽어야만 죽음 뒤의 죽음(심판)이든 영원한 생명이든 임할 수가 있다.‘

죄의 삯(wage), 죄의 대가(代價) = 사망 사망 = 죄(의 삯)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그렇다면 사망은 죄의 결과물인 것이다.
결과로서의 사망이 있기 위해서는 사망의 원인이 있어야 한다.
사망의 원인은 죄이다.
사망에 처해지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정녕 죽으리라‘에 처하기 위해서는 사망의 원인인 죄가 있어야 한다.
죄가 없이는 결코 사망은 없다.
죄로 인해 사망이 왔기 때문이다.
죄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결코 사망도 있을 수 없다.

선악과 사건이 왜 필요한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반드시, 죽는다고 했다.
먹으면, 먹지 말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다시 말해 죄를 범하면, 그 결과로 ‘정녕 죽으리라’ 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고로 선악과는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먹어야만 ‘죄의 삯’인 ‘사망’이 아담에게 임할 수 있다.
먹어야만, 죄의 대가(代價)인 ‘사망’이 아담에게 임하는 것이요, ‘정녕 죽으리라’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정녕 죽어야만 생명이신 예수께서 오실 수 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아야 할 열매가 아니라 먹어야 할 열매이다.

선악과는 동산의 수많은 나무의 열매 중 하나였을 뿐이며,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생명과 직결된 것도 아니었으며, 자유의지에 따라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먹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아무도 시험하거나 유혹한 적이 없으시다.
선악과 사건은, 인간이 뱀(사단)의 유혹을 허용함으로써, 먹고자 하는 본능을 다스리지 못한 데서 기인한, 절대적으로 인간 자신의 자유 의지의 산물이다. 
또한 선악과 사건은, 아담이 ‘정녕 죽으리라’를 받아들임으로 생명이신 예수로 다시 살기 원하신, 하나님의 의지요,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 가운데 이미 예정된 것이다.

죽어야 생명이 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먹지 말라고 명한 하나님의 명령에)불순종하는, 죄가 개입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생각의 씨실과 날실을 하나씩 하나씩 엮어 나가면서, 나름의 결론이 도출되기 시작했고, 왜 죄가 개입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마침내 저는 말씀 안에서 그 답을 찾아 제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께서 말씀 안에서 제게 주시는 확증이라고 생각하게 됐고, 뒤이어 떠오른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이 그것을 더욱 확신시켜 주며 모든 혼란에 종지부를 찍어 주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모든 혼란의 폭풍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대신 평안과 감사와 찬양의 파도가 밀려 왔습니다.
미련한 자를 미련하다 탓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깨우쳐 주신, 친절하고 사랑이 많으신 성령께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성령님, 사랑합니다.“

모든 혼란과 갈등을 일거에 해소하게 됐지만, 이 일을 통해 저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불필요하게 복음을 변명하거나 확증하기 위해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성엽 목사님의 가르침과 교훈이 인간의 생각과 주장이 아닌 성령께서 세상을 향해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굳이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떠안기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믿게 하고 받아들이게 할까 염려하며 마음 졸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도 사람들이 알아보지를 못하고 거부했다고 했습니다(요1:9-11).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해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요3:19).
하물며 누구인들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둘 중 하나만이 있을 뿐이며,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 책임 또한 내가 아닌 상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임까지 내가 떠안아야 할 것으로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저를 이단으로 판단하고 정죄한 카페는 물론, 제가 가입해 활동했던 몇몇 카페 모두 탈퇴를 했습니다.
여러 정보를 얻고 나름 유익하다고 생각해 가입했던 모든 카페에서 자진 탈퇴를 했지만, 미련하고 더딘 저를 위해 성령께서는 사랑하는 믿음의 지체를 통해 제가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카페 탈퇴뿐 아니라, 운영하던 블로그도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문을 닫았습니다.
잠들어 있는 교회와 주의 종들에게 작은 외침이나마 역할을 하고자, 하게 하신 뜻에 따라 블로그 문을 열었지만, 이제는 그 때가 다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아니어도, 그리고 거기에 굳이 마음이며 시간을 주지 않아도 세상은 잘도 굴러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 어쩌면 아버지께서 내게 그 책임을 엄중히 물으실 그 일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습니다.
그 이전에도 물론 그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일은 하느냐, 하지 않느냐, 둘 중 하나만 있을 뿐이고, 하고자 하여 순종하는 일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죽도록 충성하는 자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는 이번 일을 통해 더욱 제게 큰 음성으로 말씀하심을 느꼈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1-42)
 

댓글목록

끝까지사랑님의 댓글

끝까지사랑 작성일

은혜로님^^

이모든 깨달음과 지혜가 은혜로일뿐입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적인 진통은 오랜시간이었으리라 생각되어 마음이 짠합니다.
그러나 잘 이겨내시고 또 자유하셔서 제 마음도 매우 기쁩니다.

오랫동안 학문과 지식에서 나온 인본주의적 해석 그리고 전통에 의해 분별없이 전해졌던 해석들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어쩌면 신목사님의 설교는 그야말로 이단적 해석처럼 들려질 것입니다.
예수님당시 바리새인들도 그들의 전통과 나름의 지식으로 인해 정작 실체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요.
오히려 자신들의 확고한 신념과 자부하고 있었던 지식이 책망받자 더 날카롭게 반응하며 살인의 꿈을 키웠지않나요.
만일 제 자신도 아직 그 인본주의적 사슬에 매여있다면 역시나 같은 방법으로 정죄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러나 신 목사님을 통해 생명의 말씀이 들려지고 이를 통하여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씀이 제게 확증되어 지고 삶 에서 체험되어 지니 그제서야 그동안 은혜로 여겨졌던 모든 말씀의 해석들이 단지 사사로운 위로와 감정놀음 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지요.
이제는 이 생명의 말씀으로 채우려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설교영상을 통해 말씀을 부단히 먹고 또 먹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줄 자에게 은혜주신다 했으니 은혜받을 자에게는 이 말씀이 반드시 들려질 것입니다.
그 귀한 마음 또한 아버지께서 이미 받으신바 되었을터 너무 낙심하지 마시고 성령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통해 더 높은 믿음의 도약을 이뤄가시길 기도합니다.

은혜로님의 댓글

은혜로 댓글의 댓글 작성일

끝까지사랑님,

신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귀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인본주의적 인습의 사슬에서 풀려났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신 목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믿음으로 받아 아멘 할 수 있는 자들이야말로 복 받은 자들입니다.

저는 지난 며칠 동안 엄청난 영적 고통을 겪어야 했고,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
이 말세지말에 신 목사님을 만나게 되고,
또 목사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복이고 엄청난 은혜인지를 새삼 체득하게 됐답다.

저를 격려해 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말씀 전하시는 때에 맞춰 방문을 해야겠지요?ㅎㅎ

성영님의인도로님의 댓글

성영님의인도로 작성일

"죽어야  생명이있다"  독생자에  대한  말씀으로  풀어봅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
신성과 인성의 하나님.  인성안에 유일한 생명이 있어
그생명은 생명을 주는 생명으로 참사람의 생명이요

의가 되시는 생명이요  거룩한 피를 흘릴수있는
생명이요 하는 이것을 독생자 라고 하는것입니다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중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유일하신  생명으로  존재
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으면  되겠지요..
.

선임님의 댓글

선임 작성일

금을 캐내는 광부처럼 말씀의 보화를 잘 취하고 계신 성영님의 인도로님
성영님의 인도를 따라 구원의길을 행복하게
가시고 계셔서 기쁨니다.~~~


이메일 : sarah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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