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은혜가 너무 크기에 한편으로 갑갑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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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2-03 03:01 조회4,269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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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하는 형제님,
먼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형제님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더욱 크신 은혜와 긍휼로 넘치도록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형제님께서 신성엽 목사님의 답변을 듣기 원해 질문 글을 올리셨는데, 신성엽 목사님께서는 비밀 글에 대해서는 좋아하시지 않을 뿐더러 비밀 글에 대해서만큼은 원칙적으로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골3:16) 하신 말씀처럼, 여러 성도들이 함께 지혜를 모아 말씀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 가기를 원하시고, ‘신성엽 목사 = 문제 해결사’로 여겨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절대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시기에 성도 스스로 말씀과 성령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 가기를 바라십니다.
아울러 누누이 당부하시는 말씀은, 이곳 홈페이지에 질문을 올리기 전에 <간증의 글>이나 <기타게시판>을 살펴보아 비슷한 내용의 질문이나 답변은 없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곳의 말씀 안으로 온전히 들어와 모든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곳의 모든 말씀이 자기의 것이 된 사람에게는 이미 모든 문제에 대한 나아갈 길을 스스로 찾게 되며, 그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기에 단단한 식물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을 찾는 사람이라면 우선적으로 이곳의 모든 말씀을 한 편 한 편 소홀함이 없이 새겨듣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던(행전17:11) 베뢰아 사람들처럼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며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마음 가운데 일고 있는 여러 혼란과 갈등을 정리하고 해결하기를 원해 신성엽 목사님께 비밀 글을 올리셨는데, 위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성엽 목사님께서는 성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시고, 때로는 다른 성도들의 의견과 권면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 될 것이기에, 개인의 정보나 신상(身上)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굳이 비밀 글로 하지 마시고 다른 지체들의 의견을 들을 기회를 활짝 열어 두시라는 것입니다.
다만, 형제님께서 올린 질문 글에 대해서는 믿는 자라면 누구라도 믿음의 여정 가운데 가질 수 있는 것들이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신성엽 목사님께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며, 형제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말씀 안에서 답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래의 글은 형제님의 질문 글에 대해 신성엽 목사님과 오랫동안 대화하고 의견을 나누는 가운데 기도하며 작성한 것으로,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배워온 자로서 조심스레 나누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인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요3:16), 진리에 대한 지식 또한 소수의 특정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진리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님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이는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조롱하고 거절하며, 구원받는 사람보다 구원받지 못해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수십 수백 배는 더 많은 것을 볼 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형제님, 이런 생각들이 점점 커지다 보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던가요?
‘하나님은 실패한 분이시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실패한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사람들을 만드셨고 그들이 지옥으로 가는 것을 보고만 계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 보내주셨고 예수님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단이나 가야 할 지옥을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원 영원토록 고통당하도록 내버려 두실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셨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으니 책임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요 하나님은 책임 없다고 하면 그만인가?’
이외에도 수많은 의문들과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지 않던가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생각이 어느새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단이 주는 생각이라고 여겨 쫓아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혼란만 더 커지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까지 들지 않던가요?
사랑하는 형제님, 저는 그런 생각들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형제님께서 갖게 된 이런 혼란과 의문은 형제님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이런 의문에 휩싸이게 되고, 어쩌면 이런 혼란과 의문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언젠가는 해결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운 질문이며, 어쩌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야 답을 얻을 수 있는, 우리 이성과 지혜를 뛰어넘는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위의 말씀처럼 분명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고, 지금은 모든 것이 희미하고 부분적으로밖에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언젠가 그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과 같이 나 또한 모든 것을 온전히 알게 되는데, 그 날이 분명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를 믿는 자들이며, 또한 사모하기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잠들지 않고 더욱 깨어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
어쩌면 뚜렷한 답도 없고 결론도 없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제 생각이 정답이 될 수도 없지만, 조심스레 몇 가지 말씀에 대한 제 생각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는 말씀(복음)을 의미하며 밭은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밭은 4가지로 말씀하셨는데, 길가밭, 돌짝밭, 가시밭, 옥토밭, 이렇게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열매를 맺는 밭은 옥토밭인데, 옥토밭은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옥토밭, 다시 말해 착하고 좋은 마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달아 죄인 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이며, 또한 말씀(복음)에 순종하여 열매 맺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많은 사람들이 자주 들어 식상하다시피 한 이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다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옥토밭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씨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자세한 설명이나 언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좋은 씨’가 뿌려졌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씨, 곧 말씀(복음)은 그 자체가 생명으로, 생명은 심기면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씨가 땅에 심겼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씨가 생명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밭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길가 밭이기 때문에 참새(사단)가 와서 먹어버리는 것이고, 돌짝밭이기 때문에 조금 자라다 뿌리가 없어 곧 말라버리는 것이고, 가시밭이기 때문이 이생의 염려와 근심, 재리의 유혹에 막혀 자라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옥토 밭이기 때문에 씨가 자라 열매를 맺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단 한 번도 씨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는 씨앗(생명)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데, 단 한 번도 씨가 죽은 씨앗이라거나, 겉보기에는 씨인데 속은 비어 있다거나 하시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느냐 맺지 않느냐, 적은 열매를 맺느냐 더 풍성한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은 씨앗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심긴 밭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씨앗, 다시 말해 말씀(복음)은 그 자체가 이미 생명입니다.
‘좋은 씨’는 밭에 뿌려졌고, 이제 열매 맺는 것은 씨앗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밭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밭은 마음 밭입니다.
두 번째는 구원에 대한 것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출애굽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난 출애굽 사건을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더 알아가고 이해의 폭과 깊이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출애굽 사건은 구원의 시작은 될 수 있을지언정 구원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은 가나안 땅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출발은 될 수 있어도 목적지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이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고 하나님의 목적과 사람이 바라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쩌면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렇고, 현재 많은 사람들의 생각도 그럴 수 있는데, 출애굽 자체를 구원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을 단지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하는 민족으로 구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출애굽을 시작할 때부터 가나안을 품고 계셨고, 애굽을 떠나는 것만을 생각했던 이스라엘과 달리 하나님은 처음부터 가나안이 목적지였고 도착지였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지는 못하셨습니다.
며칠이면 들어갈 수 있었던 가나안 땅을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40년 광야생활을 통해 연단을 받아야 했고, 40년 광야생활 후에도 결국 불신앙과 불순종 세대의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다 광야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단지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나안 입성이 목적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하셨고 연단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연단을 받았습니다.
애굽의 수많은 군사와 병거가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고, 반석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었으며 의복과 신발이 헤지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했으며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갈렙과 여호수아 지파만이 온전히 가나안 땅으로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불신앙의 세대는 다 죽고 오직 계수에 들지 않은 이십 세 이하의 세대만이 40년 연단의 세월을 겪은 후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애굽은 죄로 물든 세상을 예표 합니다.
어린양의 피는 예수님(의 보혈)을 예표 합니다.
홍해 사건은 침례를 예표 합니다.
광야 40년 세월은 신앙의 연단이자 성령으로 말미암는 성품의 변화를 예표 하며, 불신과 불순종에 대한 마지막 기회입니다.
또한 광야 40년 세월은 인생을 예표 하며, 예수님으로 채움 받고 성령으로 인도 되는 삶의 모형입니다.
가나안은 천국을 예표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백성의 수보다 광야에서 죽은 백성의 수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 불뱀에 물려 죽었고, 반역한 고라 자손은 땅이 그 입을 벌려 삼켜버렸고, 아간 자손은 요단은 건넜지만 가나안 땅 문턱에서 탐욕으로 멸망했습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죽은 백성의 수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 백성의 수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실패한 것일까요?
어차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백성보다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을 백성이 훨씬 더 많을 것을 뻔히 알았던 하나님께 그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불신하고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는 것일까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어갈 수많은 백성들을 생각해 아예 처음부터 출애굽을 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했던, 비록 종 된 삶이었지만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값없이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던 애굽에서의 편안한 삶을 그냥 그대로 보장해 주셔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무리 고달프고 종 된 삶일지라도 그나마 배부르고 등 따뜻한 삶은 보장됐던 애굽에서의 삶을 버리게 해놓고서, 무엇 하러 가서 살지도 못할 가나안 땅을 약속하며 그들을 출애굽 시킨 것일까요?
과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실패한 것이며,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 실패는 하나님 때문이었을까요?
4.
형제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귀하지 않은 영혼은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존귀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창조 자체가 예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존재이며, 또한 온 세상의 주인이자 창조자이신 그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과 맞바꾼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존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왜 예수님께서 희생을 하셔야 했던 것일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요?
그렇지요.
모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단지 그뿐일까요?
단지 하나님이 어마어마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요?
앞서 제가 출애굽 사건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구원의 출발일 뿐 결과도 목적도 아니라고 했고,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가나안 땅을 목적하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애초부터 목적으로 한 가나안 땅과 우리 자신의 존귀함과 서로 어떤 연관이 있기에 뜬금없이 출애굽 사건을 끄집어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존귀함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피 흘려 죽으심도, 부활하심도, 성령이 오심도, 모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애초부터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애초의 목적은 출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땅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17:2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 아버지께 하신 마지막 기도, 그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므로 주신 그 영광을, 우리도 함께 하기를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므로 주신 그 영광’은 무엇입니까?
우리로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이며, 그 아들에게 주신 영광 가운데 함께 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아들만은 아버지를 아셨고, 아버지의 이름과 영광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요17:22-26).
아버지께서는 완전하신 사랑과 영광을 아들에게 주셨고,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영광을 증거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아버지 안에 아들이 계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셨기에, 아버지의 영광과 이름을 드러내기 원하신 아들의 소원은 곧 아버지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말씀하셨고 아들이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a)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b)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친히 자신 속에서 작정하신 그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셨고, 그 형상과 모양을 따라 우리를 지으셨고, 선악을 알게 하셨고, 때가 찬 경륜을 따라 아들을 보내 피 흘려 죽게 하셨고, 성령을 보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끌고 영생의 길로 인도하심으로, 이제 예수 안에서 아버지의 아들 된 우리도 아버지의 이름과 영광을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존귀한 것은 아들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았고, 십자가 해산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 이 세상을 창조하기도 전, 영원한 때 전부터 우리를 예정하시고 작정하신 그 목적과 부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애초의 목적은 아들 안에서 부르심 받은 또 다른 아들들이 그 영광의 자리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요17:24).
애굽이 아닙니다.
광야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내딛는 요단을 건너 도착할 가나안입니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애초의 목적지는 오직 가나안 땅입니다.
그 부르심의 출발이 어린양의 피를 믿음으로 바르는 것이며, 자아와 옛사람의 홍해를 건너야 하고, 연단과 인고의 광야생활을 통한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아야 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요단을 건너야만 가나안 땅에 발을 내디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도 사단과 그 천사들이 가는 곳인 지옥 불구덩이로 따라 들어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씨는 뿌려졌고, 열매는 밭이 맺는 것입니다.
씨가 뿌려지지 않은 곳은 어떻게 되느냐고요?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는,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신하는 것은, 아버지는 공의로우시며 결코 편벽됨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소돔 땅의 롯과 그 식구들을 구원하심으로,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 받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았습니다(창18:19-33).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롬3:4) 하신 말씀처럼 사람은 편벽되고 치우칠 수 있어도 오직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못하시다면 결코 세상을 심판할 자격이 있을 수 없고 이길 수도 없습니다(롬3:4-6).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자는 아버지의 공의에 맡길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는 것만이 최선이며, 맡기는 자만이 확신 가운데 다른 것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바로 전하는 것입니다(딤후4:2).
오직 성령을 의지하여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행전1:8).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전16:6-10)
복음 증거의 주체는 성령이시며 성령께 그 주권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으며, 아시아가 아닌 유럽 땅에 먼저 복음이 증거 되도록 하셨고, 유럽을 거쳐 마지막 때가 되어서야 아시아 땅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따지며 이렇다 저렇다 말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는 누가 옥토밭이며 누가 착하고 좋은 마음 밭의 소유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 전하는 것이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나아갈 뿐입니다.
순종하며 나아갈 때 루디아도 만나는 것이고(행전16:14),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만나는 것이며(행전8:26-29), 사르밧 과부와 같은 사람도 만나(왕상17:8-24) 구원의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누가 루디아인지,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인지, 예수님(엘리야) 아니면 소망 없는 과부와 같은 사람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오직 성령께서는 아시기에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며, 성령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저의 글이 많이 부족하고 또한 형제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줄 답이 되지 못하다는 것도 잘 압니다.
어쩌면 저의 글이 더 큰 혼란만 가져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형제님께서 올린 글을 통해 신성엽 목사님과도 깊이 의논을 했지만, 결론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었고 오직 말씀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눈, 다시 말해 인본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조화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기 때문에 믿는 것이며 믿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시며 오직 한 분이신 삼위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말씀이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오직 예수 이름만 붙잡는 것이며, 말씀이 죽으면 그대로 끝이 아니라 심판이 있다고 하니 그렇게 믿는 것이며,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이라고 하니 지옥을 믿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보여지고 나타나고 완전히 계시되어야만 믿을 수 있다면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이성과 지혜로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 그것이 의인의 길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제가 염려하여 부탁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형제님 마음속에 일고 있는 여러 혼란과 의문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더 이상 그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문들이 혹여 형제님의 믿음을 훼손하고 낙담시키는 빌미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지키십시오.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마귀에게 빌미를 주지 마십시오(벧전5:8).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갈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잘 알지 못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하는 것이며(막12:24), 오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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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님의 댓글
천지 작성일
저의 무지함과 막연한 질문에 이처럼 정성과 성의를 다해 답변해주심에 큰 수고를 끼쳐드린것 같아 미안함과 더블어 참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글을 올리기 전에 모든말씀을 열심히 듣고 기도하고 하였어야 햇는데 하는 생각에 미안함이 밀려왓어요.왠지 시험한것 같은 생각등등 다시한번 죄송하다해야 마음이 편할것 같습니다.궁금하고 이해되지 않는문제들은 열심히 기도 하는것으로 하겟습니다
요즘 전 목사님 말씀듣는데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으며 내안에 계신성령님이 기뻐하심을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의삶에 있어서 이처럼 감격해본적이 없었지요.저는주님을 아주작은 소리로 불렀을 뿐인데...주님은 내안에 속히 오셨습니다.할렐루야!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올립니다. 이렇게 귀한 말씀을 접할수 있다니..참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열심히 전도하며 증거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