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들의 길, 구원의 완전성과 영원성
(에베소서를 중심으로)
1.
신성엽 목사님의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 말씀이 벌써 다른 카페에 올라온 것을 보았습니다. 귀한 말씀이 여기저기 소개돼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뻤지만 또 한편으로는 씁쓸하고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파리 떼처럼 달려들어 어김없이 판단하고 재단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일한 말씀을 통해 어떤 이는 은혜를 받고 감사의 고백들을 하는 데 반해 어떤 이는 판단과 반박의 자료들만 열심히 들이대고 있으니, 말씀에 대한 반응이 곧 영생의 길을 결정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을 오늘까지 3번 들었습니다. 듣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많은 은혜를 받았고, 특히 제가 조금은 의구심을 갖고 있던 부분들이 말끔히 해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신화적 해석에 약간의 가능성을 두기도 했습니다. 제시되는 이론과 근거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것을 주장하며 가르치는 목사들이 제가 보기에는 그나마 신실한 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천사들이 아닌 사람들을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만일 타락한 천사들이라면 잘못(죄)은 그들이 했는데 심판은 사람이 받는 것이 되기에, 그렇다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고, 이는 또한 모든 것을 판단하며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조금이나마 누룩 섞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저의 마음을 돌이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기회를 주신 성령님과 목사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글을 시작하면서부터 신성엽 목사님의 설교를 꺼낸 것은, 제 나름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말씀을 통한 이해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워낙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차일피일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장생활과 가정 일을 병행하다 보니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시간일 수밖에 없는데, 때마침 목사님의 설교가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아 이 기회를 통해 함께 나누고자 시간을 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최근 에베소서를 중점적으로 읽고 묵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간 에베소서를 여러 번 읽었지만 다른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구원’이라는 각도에서 보게 되었습니다(보게 하시더군요!).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질문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제 스스로에게 끝없이 했던 질문도 바로 ‘너 자신은 구원 받았는가?’ ‘너에게 있어서 구원은 무엇인가?’ ‘너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고(엡1:4, 딤후1:9),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엡1:7, 히9:22, 레17:11). 이것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갖고 계셨던 계획이었으며(1:11, 3:11), 아담의 타락 여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친히 작정하신 스스로의 뜻이자 목적이며 계획이었으며(엡1:9), 또한 아담으로 인해 인류가 죄와 사망 가운데 처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에 따른 것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여기까지는 신성엽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해하고 동감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셨고, 선악과 사건이 우연이 아닌 필연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몇몇 말씀들을 통해 찾아보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삼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특별한 목적과 의도를 갖고 지으셨는데, 그 목적과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선한 행위를 하는 친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 가운데 인간에게 원하신 선한 행위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창세기 1장의 삼위 하나님의 대화(의논)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지으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자들이 이 땅을 다스리고 지배하며(보이지 않는 정사와 권세들까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자들의 발 앞에 굴복하기를 원하셨으며, 당신의 형상을 소유한 자들이 번성하여 이 땅 가득 충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한 것이 무엇인지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선한 것은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 율법 등이 선하다고 배웠습니다. 곧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시다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말씀하신 것이지요.
위의 창세기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을 통해 당신의 선한 의지와 목적이 드러나기를 원하셨고, 유일하고 참된 당신의 영광과 형상이 온 땅 가득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채우기 원하셨고, 그것을 실현할 방법으로 당신의 형상을 소유한 피조물, 곧 사람을 통해 그것을 실현코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의지가 실패한 듯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잘 알다시피 선악과 사건이 바로 그것으로, 과연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한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다른 곳의 말씀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에베소서 말씀 안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
하나님께서는 빛을 만드셨고 어둠도 친히 지으셨습니다. ‘있으라’ 명하시매 만물이 그 본질과 형태대로 밝히 드러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직접 계획하시며 그것을 친히 성취하는 분으로(렘33:2), 무엇으로 말미암지 않고 스스로 계시며(출3:14), 처음과 나중이 되는 분이십니다(계1:8).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과 반역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우연히 발생한 선악과 사건을 통해 허겁지겁 서둘러 구원을 계획하셨다는 것은 인간 중심적 생각이요 인간을 밥(흙)으로 삼아 지배하고 군림하는 마귀에게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그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었는지, 사단이 뿌려 놓은 가라지가 얼마나 질긴 것인지 뒤늦게나마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쳐 주는 참된 주의 종을 만난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요!).
3.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셔서 이 땅 가운데 두신 이유와 목적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해 성경 구석구석에 다양한 형태로 숨어 있지만 제가 묵상한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 ‘구원’의 시각에서 좀 더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엡2:1,4). 그리고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셔서 하늘에 함께 앉히셨습니다(엡2:6).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졌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주어진 것이며, 오직 예수(보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은혜에 근거한 하나님의 선물(엡2:8)임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믿습니다.
그런데 6절의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받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제가 보기에 그 이유는 6절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또한 하늘의 처소들에 앉힐 정도라면 이는 그야말로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들에게나 가능한 것으로 여겨버리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저는 이어지는 10절의 말씀에서 그 뜻을 찾아보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직 하나님(의 일)만이 선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고,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온 땅에 가득해서 모든 만물들을 다스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당신의 영광과 선한 의지와 형상이 사람을 통해 발현되어 온 땅에 영원토록 가득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멸할 흙의 몸을 통해서는 영원토록 실현코자 하셨던 당신의 선한 의지와 계획을 이룰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사단이라는 가시를 두었고, 선악과 사건을 통해 선과 악을 경험할 기회를 주셨으며, 결국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죄 가운데 가두어 두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주신 것입니다(갈3:22).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신 이유는 수없이 많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에게 사람의 본분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로 함께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인간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선과 악을 경험한 아담(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사단의 길이요, 곧 하나님의 아들들의 길과 사람의 딸들의 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택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을 때, 다시 말해 만들어진 이유와 목적을 실현하지 못했을 때 사람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말들을 하지만 이는 악한 것이며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사람은 죄와 허물로 죽었고, 본질상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엡2:3). 그러나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예수와 함께 우리를 세우셨으며(raise us up together), 또 함께 하늘 영광의 자리에 우리를 앉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광대한 우주의 한 귀퉁이에 지구별이라는 작은 못자리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 못자리 안에 사람이라는 볍씨를 뿌려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볍씨가 자라 우주라는 논에 심겨져서 충실한 이삭으로 자라 하나님의 곳간에 들여져 당신의 무한한 기쁨과 만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구별은 볍씨를 뿌려 놓은 못자리와 같습니다. 못자리는 모가 논에 심겨지면 그 역할이 끝납니다. 또한 모는 모판에 있을 때 충실하게 발아해서 옮겨 심겨지기에 적합한 형태로 자라야 합니다. 만일 볍씨가 여전히 종자로만 머문 채 자라지 않는다면 그 볍씨는 논에 심겨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궁극적인 목적은, 못자리와 같은 이 지구별에서 우리가 볍씨로 충실하게 자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논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모내기철이 끝나면 사라질 못자리와 같은 이곳이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볍씨로 자라는 것이 목적입니다.
영광의 자리는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가 머무를 곳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못자리와 같은 지금, 이곳에서, 볍씨로 충실하게 자라나야 합니다. 예수 믿어 거듭난다는 것은 이제 막 종자로 심겨진 것에 불과합니다. 충실한 볍씨로 자라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옮겨져 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영광과 선한 의지가 온 우주 가득히 채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주라는 논에 곧바로 볍씨를 뿌리지 않고 지구라는 못자리를 거쳐 옮겨 심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쭉정이가 될 것인지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인생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못자리와 같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택할 것인지, 충실한 볍씨로 자라갈 것인지 여부를 우리의 인격과 의지와 순종을 통해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작고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주의 종들이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지만, 예수 믿어 죄 사함 받고 천국 가는 것이 전부인 양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옥 형벌 면하고 생각만 해도 좋은 천국에 가는 것만이 전부인 양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죄 사함 받아 천국 가는 것만이 구원의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처소에 우리를 앉히셨습니다(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앉는다는 것은 일으켜져 앉는 것입니다. 바닥에 앉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일으켜졌으며, 하나님의 자녀만이 앉을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만물을 통치하시고 당신의 발아래 두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앉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 맏아들 되신 예수와 함께 온 우주를 가꾸고 경작하며 다스리는 우주의 주인공으로서 우리를 그 자리에 앉히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거듭나 성령으로 다스림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만이 드러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셨던 선한 행위가 우리를 통해 발현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선한 행위는 이 땅에서부터,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 끝도 없는 영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와 목적은 죄 사함 받아 천국 가는 것뿐 아니라, 우리 안에 두신 당신의 영원하시고 궁극적인 목적을 우리가 깨달아 잠시 머무는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당신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의 길을 걷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해 죄 사함 받고, 그분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 새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영원한 멸망의 불 가운데서 태워질 쭉정이와 같은 우리가 인생이라는 모판에서 예수를 만나 알곡이 될 자들로 변화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왕 노릇하며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온 우주 곳곳을 누비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득 가득 채워갈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할진대, 우리가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는 말이 어찌 막연하고 모호한 의미일 수 있겠으며, 어찌 특별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의 전유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목적 가운데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것이기에(3:11, 1;4), 마땅히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의 필수 요소이자 자녀 된 자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할진대, 어찌하여 이 땅의 수많은 주의 종들은 그리도 얄팍하고 천박한 복음으로 영혼들의 믿음을 노략질하는 것인지요? 하나님의 구원의 광대하심과 인생을 향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깨닫지 못한 자라면, 그가 목사이든 신학자이든 영혼들을 이끌어 갈 자격이 없을뿐더러 엄위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4.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시고 다스리는 곳이며(히11:10, 16) 진동치 못할 나라입니다(히12:28). 그곳에서 그분께서 친히 우리를 부르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곳은 잠시 머물다 때가 되면 떠나야 할 곳이기에, 우리의 삶은 나그네 길이며 순례의 길입니다(히11;25). 만일 이곳이 전부인 양 끌어안고 애착을 갖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부인하는 자이며(갈5;24), 믿음이 없어 더 나은 본향을 찾지 않는 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히11:13-16).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 됨을 심히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히11:16).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는 예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이며(5:1), 빛의 자녀이며(5:8,14), 새사람을 입은 자이며(4:24), 생각과 본성 자체가 새롭게 된 자이며(4:23), 용서 받은 자이며(4;32),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며(5;5), 구별된 성도이며(5;3), 성령으로 충만한 자이며(5:18), 예수가 머리 된 자이며(5:23), 또한 예수의 몸이며(5:30), 아버지의 원수 마귀와 싸우는 자입니다(6:12).
하나님의 아들들이여, 우리에게는 우리의 시대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끝도 시작도 없는 광활한 우주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으로 충만한 그곳에서, 은하와 성단을 넘나들며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며 누릴 그 찬란한 때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오, 하나님의 아들들이여, 오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서 우리가 만나 함께 노래하며 기뻐할 그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엡2:18).
영원하신 왕 곧 죽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딤전1:17)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끝없는 세상까지 영광을 돌릴(엡3:21) 그 거룩한 때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오, 하나님의 아들들이여,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의 딸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몸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논에 알곡의 백성으로 심길 때까지…….
5.
제 글이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면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새벽부터 쓰기 시작했지만 집중해서 쓰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님을 알지 못하거나 또 거절하여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즐겁고, 세상이 주는 만족이 대단히 커서 우리 주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영광의 풍성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구원이 또 얼마나 자랑이 되겠습니까? 다 함께 치우쳐 멸망의 길로 가던 자들이었는데, 웬 은혜인지, 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어찌 갚아야할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의 목숨까지도 다 내어버릴 수 있는 크나큰 은혜인 것을…….
하늘 가는 믿음의 길이 좁고 협착하지만, 우리의 가는 길이 봄볕에 잠시 졸다가 깨어난 것처럼 금방 지나갈 것입니다.
그 길이 부디 어렵고 힘든 길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우리의 때가 기다리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간다면 더 신명나는 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어, 제가 받은 은혜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함께 가는 이 길에 좋은 스승이 계시며 믿음의 형제들이 있어 행복합니다.